우연이었을까. 아플 무렵이었고, 그래서 삶을 통틀어 엄마 생각을 가장 많이 한 때였다. 그 즈음 내게 도착한 책의 표지에 모두 엄마가 있었다. 에세이집 『엄마 에필로그』와 소설집 『엄마도 아시다시피』. 한 엄마는 지순했고, 한 엄마는 지독했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가 쓴 『엄마 에필로그』는 오십을 맞은 저자가 오십 살 때의 엄마를 떠올리며 시작하는 이야기였다. 온몸의 근육이 굳어가는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기일은 심 대표가 태어난 다음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엄마의 제사음식으로 생일상을 받는다. 기일(忌日)과 생일(生日)의 깍지. 그것은 또 작은 우연일 테지만 내겐 커다란 은유로 다가왔다. 죽어서도 딸을 먹이는, 엄마라는 사람. 자궁(womb)이자 무덤(tomb).
책을 읽기도 전, 습관적으로 펼친 마지막 페이지에서 엄마의 가장 오래된 유품인 숟가락을 만났을 때, 다짜고짜 눈물부터 나던 이유가 그것이었을 것이다. 숟가락이라니. 그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사물이라니. 엄마가 해준 더운밥을 떠먹듯 한 술 한 술 책을 읽어나갔다. 그녀의 엄마가 나의 엄마와 너무 닮아서 자주 숟가락을 놓고 창밖을 보았다. 폐렴으로 입원을 했을 때였고, 내가 머물렀던 6인실의 환자들은 공교롭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모두 엄마였다.
처음엔 그곳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바로 코 앞, 1미터도 되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고통에 찬 소리 때문이었다. 그이는 사람의 것이 아닌 소리로, 정확한 음절이 되지 못하는 신음을 뱉다가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술 취한 사람처럼 어머니를 찾는다. ‘어머니! 살려주세요, 어머니…. ’ 단속적으로 이어지는 절규에 가까운 신음. 그리고 다시 부르는 소리. 이번엔 죽음 쪽을 향해서였다. ‘어머니, 나 좀 데리고 가. 어머니, 제발! 어머니…’. 통증이 가파르게 올라가는 게 가림막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러다가 더는 오를 곳 없이 극점에 다다른 통증이 언어로 터져 나오는 듯,
‘엄마, 엄마, … 엄마….’
엄마를 부른다. 말투가 꼭 아기가 엄마를 부를 때의 그것이다. 그 목소리가 갑자기 너무 평온하여, 서늘하다. 지금 그이가 어떤 경계에 서 있는지,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 것 같았다. 그곳을 지나서 다음날 아침 그이는, 먼 곳으로 갔다. 아마도 엄마의 곁으로. ‘연우’라는 이름을 지니고, 누군가의 엄마로 살았던, 쉰하나라는 짧은 생이었다. ‘연우야, 연우야?’ 그이의 젊은 엄마가 어린 그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엄마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지상에 와서 발음하는 최초의 음절이자, 지상을 떠나기 전 부르는 최후의 이름, 엄마.
병실의 엄마들 중 한 엄마가 내게 말한다. “참지 말고 살아요. 술, 담배도 안 하는 여자들이 왜 이런 병에 걸리겠어. 나는 이제 위험해서 수술도 못해요.” 참고 살아왔을 세월과 사연들이 짚어져 나는 소나기처럼 울었다. 누구나 무언가를 견디다 가는 것이 삶이다. 그렇지만 엄마들은 참으려고 세상에 온 존재인 마냥 견딘다. 통증을 참고, 허기를 참고, 남편을 참고, 새끼를 참고, 오욕칠정을 참고….
퇴원 후 천운영 작가의 소설집 『엄마도 아시다시피』를 넘겼다. 거기엔 다른 엄마가 있다. 욕망하는 엄마, 결핍과 분노와 불안에 일그러진 엄마, 오욕칠정을 온몸으로 사는 엄마. 그것이 조금은 불편하면서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종의 ‘쾌’에 가까운 감정이었달까. 우리의 엄마는 실은 그런 엄마이기도 하니까.
우연하게도 올여름엔 엄마 생각을 많이 했다. 내 엄마에 대해. 우리 엄마들에 대해. 모성에 대해. 생명에 대해. 그 무자비하고 광기에 가까운, 맹목에 대해. 지순(至純)하고 지독(至毒)한 보통명사에 대해. 그러노라 그만, 그 병실에 정이 들었다. 사랑의 지병을 앓는 이 아픈 세상에.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9호 2013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