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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칼럼] 심심하고 深深하고 深心하여라 [No.115]

글 |허은실(시인, <빨간책방> 작가) 사진 |허은실(시인, <빨간책방> 작가) 2013-05-27 3,972

햇살이 요염하다. ‘데드라인’이 코앞이라 큰맘 먹고 오전부터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런데 햇살이 요염하다. 좋아, 이십 분만! 덮고 일어난다. 읽어야 할 책과 보내야 할 원고와 이런저런 밀린 일들이 소매를 잡는다. ‘저기요, 이러시면 곤란하거든요?’ 뿌리친다. ‘데드라인’ 못 지킨다고 설마 진짜 죽기야 하겠어? 호기롭게 떨쳐 일어났지만 뭐 대단한 일을 할 것도 아니다. 햇살의 관능에 몸을 허락하기로 한다. 이십 분만 심심하기로 한다. 햇살의 애무를 느끼며, 동네를 어슬렁거린다.


어슬렁거릴 때 잘하는 짓은 단어를 굴리는 일이다. 말이 업인지라, 내게 말은 말하자면 심심풀이 땅콩이다. 우선 보이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단어 하나를 간택한다. 가령 이 글의 맨 첫 줄에 등장한 ‘요염’이라는 말에게 말을 건다.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저리 가거라 뒷태를 보자’ 이리저리 굴려보고 요모조모 뜯어본다. 그러면 ‘요염’이라는 말은 얼마나 요염한지! ‘요’ 하며 모아지는 입술, 당겨지는 볼 근육과 살짝 긴장하는 턱. 그렇게 입술을 내밀며 유혹을 한 뒤, ‘여’ 하고 입을 살짝 벌리는가 싶더니, 이내 ‘ㅁ’으로 다물어버린다. 교태를 흘리고 돌아서 애태우는 여인처럼. 말은 그렇게 조금씩 곁을 내어준다. 신문이나 광고나 간판에서 그저 무심히 지나치던 단어들도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 말의 속살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심심해야 할 수 있는 짓이다.

 

사실 작가들은 심심한 족속들이다. 글을 쓰지 않을 때는 천하의 한량들이다. 그래서 곁에서 보면 작가들은 한심한 족속들이다. 종종 빈둥거리고 때때로 멍하니 있고 자주 술을 마신다. 하지만 그런 심심한 짓거리들이 실은 뭔가를 찾는(尋) 일이다. 닭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알을 품고 있듯이 글의 씨앗을 부화시키는 시간이다. 무미하고 무의미한 시간들이야말로 창작의 원천이다.

심심해야 꽃이 보이고 새가 들린다. 세계와 비로소 깊이 사귈 수 있다. 나무 그늘이 만들어내는 어지러운 무늬를 바라보다 보면 내 마음의 무늬도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심심하다는 건 깊어진다는 것. 깊이 생각할 여유를 갖는 것이다. 심심할 때야, 비로소 깊은 사유의 바다로 내려갈 수 있다. 심심한 것은 深深하다. 그리하여 깊은 마음에 도달할 수 있다. 심심함은 深心함이다.

심심하다는 건 심심한 음식을 먹는 일. 간이 세지 않고 자극적인 향신료가 없어야 원재료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봄나물에 묻어있는 흙의 냄새와 햇살의 당도를 느낄 수 있다. 내게 주어진 것들을, 내 삶을 맛있게 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납세고지서 같은, 폐신문지 속 글자들 같은 일상에서 시적인 순간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도대체 심심할 겨를이 없다. 심심함, 그건 사치다. 그런데 사치란 뭔가. 꼭 필요하지 않은 데다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심심함도 시간 낭비가 필요한 일이다. 작정하고, 짬을 내서, 애써 심심해져야 한다. 일부러 심심해야 음악도 듣고 연극도 볼 수 있다. 심심해야 심미안이 생긴다. 심심해야 문화 시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이라고 불평하면서도, 막상 심심한 시간이 주어지면 불안해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타고난 저마다의 한량 소질도 계발해야 하는 법. 심심함도 연습이 필요하다.


우선 일주일에 하루쯤, 아니 한나절쯤이라도, 그것도 어렵다면 한 시간? (역시 무리인가?) 그럼 한 십오 분쯤! 주부들이여 외도를 하자. 학생들이여 가출을 하자. 직장인들이여 회사를 때려치우자. 그리고? 한량이 되자. 그냥 커피 한 잔 들고 벤치에 앉는 거다. 앉아서(일어서거나 누워도 무방하다.) 커피와 햇살과 바람을 천천히 들이는 거다. (‘반드시 혼자서, 최대한 천천히’라야 한다. 그래야 간지와 포스와 아우라와 후광이 생긴다.) 외도씩이나, 가출씩이나 하고 겨우 그거냐고? (그러니까 내 말이요.)

그래도 이 ‘찬란’을 그냥 두는 건 생에 대한 직무유기 아닌가! 햇살이 요염하다.

 

허은실 : 시를 씁니다. 생계형 라디오 작가입니다. 심심한 글 읽어주신 데 심심한 감사의 말을 전하며 이렇게 <더뮤지컬> 독자들께 첫인사를 전합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5호 2013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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