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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먼슬리픽] 4월의 추천작 [No.103]

글 |편집팀 2012-04-09 3,758

더뮤지컬이 추천하는 4월의 볼거리, 읽을 거리

 

비틀린 열정과 외로움 『조광화 희곡집』(푸른북스 발행)

조광화 작가를 처음 만난 건 2003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연출할 때였다. 연극계의 주목받는 연출가가 뮤지컬 연출을 맡았다고 해서 기대가 컸다. 인터뷰를 하기 전에 평민사에서 나온 『조광화 희곡집』을 읽고 갔다. 작가의 서문이었던가, 지금도 기억나는 대목은 연극은 원형의 기억을 담아내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제의적인 행위로서 연극은 집단 무의식을 담아내는 것이고, 집단의 경험으로 형성된 원형을 재현하는 것이다.

 

조광화 연출의 두 번째 작품집 역시 같은 제목이다. 이번 작품집에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말은 ‘비틀린 열정’과 ‘외로움’이었다. 작가는 이번 책의 첫 번째 작품 <검객괴담, 됴화만발>의 작가 노트에서 원작인 일본 작품을 본 느낌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내 작품이 갖는 두 가지 주제, 비틀린 열정과 외로움 중 후자를 글자 그대로 목격했다.”

 

이번 『조광화 희곡집』에는 총 네 편의 희곡이 실렸다. <미친 키스>, <철안붓다>가 비틀린 열정에 가까운 이야기라면, <검객괴담, 됴화만발>, <황구도>는 외로움에 가까운 이야기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비틀린 열정과 외로움은 완전히 구별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한 작품 속에서도 열정과 외로움은 등을 맞대고 다른 얼굴로 드러난다. <철안붓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미래의 유전자 인간들은 삶을 향한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인다. 뒤틀린 욕망이 무한 증식하는 그곳에는 폐허만이 있을 뿐, 마음을 나눌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다. 절대 고독한 영생이란 죽음과 다르지 않다. 절대 고독을 형상화했다는 <검객괴담, 됴화만발>은 <철안붓다>를 뒤집어 놓은 작품이다. 혼자 살아남아 영생을 누리는 검객 케이는 영생을 욕망하던 진시황과 의원의 뒤틀린 열망이 낳은 사생아이다. 출구를 찾지 못한 열정을 쇼핑과 섹스로만 소비하는 <미친 키스>의 인물들도 외로운 존재인 것은 마찬가지다.

 

네 편의 작품 중 우화적인 접근을 한 <황구도>만이 비틀린 열정과 외로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전 작품보다는 편안하다. 섹스를 위해 사랑을 하는 인간들과 대조적으로, 순수한 사랑을 추구하는 황구 아담은 오랜 여행 끝에 그가 찾던 사랑의 한 조각을 본다. 이제 나이가 든 캐시와 거칠이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눈을 감는 마지막 장면은 사랑이나 외로움, 열정이 탈색되어 더 이상 그 형체가 남아있지 않은 해탈의 느낌을 준다.

 

이번 작품집에 실린 희곡들은 세상에 나온 지 10여 년은 된 작품들이지만 <철안붓다>를 제외하고는 근래에 무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작품을 보고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영상 지원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연출을 병행하기 때문에 무대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희곡과는 또 다르다. 특히 <검객괴담, 됴화만발>은 스토리보다는 무대 위의 에너지로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어서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희곡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희곡이 그렇듯 독자의 상상력으로 완성되는 희곡은 공연과는 또 다른 문학적 즐거움을 준다.  |  박병성

 

 

섬세하고, 예민하고, 우울했던 날들의 추억 <모리세이 내한 공연>

“나도 스미스 좋아해요.” 톰의 헤드폰 사이로 새어 나오는 노랫말을 흥얼거리고 나선, 공기보다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썸머. 순간, 썸머에 대한 톰의 감정은 호감에서 사랑으로 폭발한다. 영화 <500일의 썸머> 속 한 장면이다. 그때 톰이 듣고 있던 노래는 10톤 트럭이 우리를 덮친다고 해도 함께 맞이하는 죽음은 기쁨 그 자체라고 말하는, 스미스식 러브송이다. 스미스는 1980년대의 상징이자 브릿팝을 있게 한 맨체스터 출신 영국 밴드. 꽃이 만개하는 5월, 그러니까 그와 꼭 어울리는 계절에, 스미스의 프론트맨이었던 모리세이가 한국에 온다. 사실 스미스가 한 시대의 상징이라 불릴 만큼 젊은이들의 숭배를 받았던 데는 모리세이가 쓴 가사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고독한 영혼을 테마로 하는 그의 가사들이 섬세한 사춘기 소년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었던 건 그의 우울과 슬픔이 어떤 ‘포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외 투어 공연 중이었던 모리세이가 무대에 올라 “오늘은 너무 우울해서 공연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퇴장했고, 관객들은 ‘모리세이니까’ 이해하고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는 일화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출생인 내가 스미스의 팬이라고 말하는 건, 지기 싫어 부리는 억지 같다. 하긴 내 인생의 노래라고 스미스를 들었던 어떤 사람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밴드였을 테지. 그는 지금 어디서 누구와 사랑하고 있을까. 모리세이의 공연 소식을 들었을 땐, 어떤 날들을 떠올렸을까. 5월 6일/ AX-KOREA/ 02-332-3277 |  배경희

 

 

위대한 반역자의 춤 <스파르타쿠스>

2001년 최태지 단장이 야심차게 도전했던 <스파르타쿠스>는 남성 무용수들이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부족했던 당시 한국 발레계의 한계 속에서  ‘도전’ 그 자체에 의의를 둘 만한 공연이었다. 한국보다 발레의 수준이 한 세대는 앞서 있었던 일본보다도 먼저 아시아 최초로 무대에 올렸으니 그 패기와 의욕은 높이 살만하다. 당시 공연을 지켜본 발레팬들은 작품의 객관적인 수준을 떠나서 해낼 수 없는 것을 해내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하는 무용수들의 에너지가 인상적인 공연이었다고 말했다. 2007년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발레단과 합동으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린 데 이어 5년 만에 국립발레단 단독으로 다시 한 번 관객들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국내 초연 이후 11년간 놀랄 만큼 급성장한 한국 발레계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만한 작품이다.

 

로마노프 황실의 지원 아래 꽃을 피웠고 차르와 그 일가가 모두 총살당한 후, 그 가해자인 공산당 체제 아래서 달콤한 열매를 수확했던 러시아 발레의 기구한 역사 속에 <스파르타쿠스>는 구소련 인민 예술의 정점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로마제국의 압제에 저항하여 민중 봉기를 일으키지만 끝내 패배하고 숭고한 희생을 하는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영웅담은 소련 공산당의 입장에서 계급투쟁의 가치를 드높이는 혁명 발레의 소재로 부족함이 없었다. 구소련의 대표적인 작곡가 하차투리안이 1954년에 곡을 쓰고 2년 후 레오니드 야콥슨이 안무를 한 이 작품은 1968년 유리 그리가로비치가 개정 안무와 연출을 맡으면서 소련이 자랑하는 국보급 예술작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작품의 위대함은 구소련이 해체되고 그 체제가 완전히 무너진 지 2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여전히 세계 각국에서 사랑받고 있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연히 주인공은 ‘착한 편’이지만 순결한 혁명가인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여인 프리기아가 보여주는 지고지순한 사랑과 희생의 춤만큼이나 오만한 로마 장군 크라수스와 퇴폐적인 정부 예기나의 춤 역시 이국적인 에너지와 관능적인 매력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양치기들, 노예 검투사들, 로마 군사들 등 여러 그룹의 군무가 성격에 따라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는 것도 즐겁다. 4월 13일~1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 하우스 |  김영주  

 

살아있는 이야기를 읽는 재미 『위풍당당』

소설가를 동경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으뜸은 그가 타고난 이야기꾼임을 절감할 때이다. 난생 처음 듣는, 세계 곳곳 어딘가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들이 막힘없이 쭉쭉 속도감 있게 이어질 때, 내일의 출근을 위해서는 이 책장을 덮어야 하는데 어느 시점에 멈춰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눈뜨고 사는 삶의 재미도 중요하지만, 나는 눈감은 시간을 무척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므로.) 그런데 사실은 소설보다는 현실에서 더 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이 터져 나온다. 세상에 이런 일이, 하고 놀랄만한 일들이 입에서 입으로, 클릭과 클릭으로 전해지지만, 왜 그런 현장 보도나 가십에는 도통 관심이 쏠리지 않는 걸까. 어떻게, 왜 일어난 일인지 그 연유가 불분명하고, 스스로도 잘 모르는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없을 때, 이야기의 가치는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들끼리 다투었던 시시콜콜한 사연이 대책 없이 웃기거나 가슴 쓰라린 건, 그 웃음과 감동에 작가의 의도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소설가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작가가 그걸로 먹고 사는 사람 아닌감. 남들이 갖지 못한 아이템 하나가 더 있으면 게임에서 우세하듯이, 작가에게 유리한 최고의 무기는 문체다. 아, 쫄깃한 글을 읽을 때의 그 말맛. 어떻게 발끝에라도 따라가 보고 싶어서 재밌게 읽은 소설가의 말투는 은근히 따라서 써보기도 했다.

 

많은 소설들이 도시에 사는 현대인의 고독을 덤덤하고 처연하게 곱씹어댈 때, 파고가 낮은 문장들을 읽으며 나도 덩달아, 조금 다른 의미의, 차가운 도시의 여자가 되곤 했다. 하지만 성석제의 소설을 읽으면, 투박하게 팔딱거리는 문체가 내 머릿속에 낀 허영을 긁어내는 쾌감을 느낀다. 조금은 모자란 사람들이 날선 말들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서 낄낄낄 웃어대고 나면, 모자란 인간들이 부딪히고 있는 데가 바로 현실임을 알게 된다. 현실 비판적인 보통의 현대 소설들에 비하면, 그의 글은 『춘향전』과 『흥부전』, 앗 너무 멀리 갔나, 아무튼 전통 문학 같은 맛이 난다. 그가 지난해 계간 <문학동네>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장편소설 『위풍당당』을 냈다. 이번에는 우연한 계기로 시골 마을에 내려간 조폭들이 현지인들과 부딪히며 정드는 이야기란다. 조폭의 입이 더 건지, 시골 사람들 사투리가 더 험악한지 비교하는 재미가 있을 듯.  |  이민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3호 2012년 4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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