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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LONDON] 세련된 증권맨의 살인 해법, <아메리칸 싸이코> [No.127]

글 |조연경(런던 통신원) 사진 |Manuel Harlan 2014-04-09 4,165

제목부터 미국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 영국에서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2013년 12월, 영국 뮤지컬의 중심인 웨스트엔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담한 극장에서 첫선을 보인 <아메리칸 싸이코>는 오프웨스트엔드에서 막을 올렸음에도 제작 전부터 많은 기대를 모았다. 1991년 출간된 동명의 원작 소설은 쏟아지는 혹평과 호평 속에 미국에서만 백만 부 이상 팔린 유명 작품이었다. 2000년에는 크리스찬 베일을 주연으로 영화화되어 다시 한 번 인기를 끌었다. 이미 성공한 원작의 인지도를 등에 업었고, <스프링 어웨이크닝>으로 유명한 작곡가 덩컨 쉬크가 오랜만에 내놓은 신작인 만큼 화제가 될 요소는 충분했다. 게다가 최근 영국의 장수 드라마 <닥터 후>에서 하차한 영국 배우 맷 스미스가 차기작으로 이 작품을 선택하면서 스타 캐스팅 효과도 톡톡히 봤다. 티켓은 진작 매진되어 표를 구하기 어려웠고, 그나마 당일에 풀리는 데이 티켓이나 취소 표라도 구하기 위해 관객들은 매일 새벽부터 극장 앞에 줄을 섰다. 단지 괜찮은 원작을 바탕으로 한 평범한 작품에 불과했다면 금세 열기가 식었겠지만, 1980년대 뉴욕 증권가의 연쇄살인마 이야기를 세련된 조명과 전자음악에 버무린 작품은 꽤 신선했다. 평단의 호평에 힘입어 조만간 웨스트엔드에 성공적으로 입성해 다시 공연될 거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겨우 두 달 남짓 짧게 공연한 뮤지컬 <아메리칸 싸이코>는 그렇게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놓곤 홀연히 사라졌다.

 

 

 

 

명품이 만들어주는 존재 가치

 

공연 시작 전, 무대에는 막이 내려져 있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하얗고 단조로운 무대는 하얀 가죽 소파와 유리 탁자, 최신 전축이 놓인 고급스러운 아파트 내부였다. 아날로그 텔레비전이 지지직거리는 듯한 소음과 함께 공연이 시작되자 휘황찬란한 레이저 광선이 무대를 어지러이 맴돌았고 관객들이 가득 메운 1층과 2층의 객석 곳곳에서 배우들이 하나둘 일어서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배우들의 건조한 노래가 사방을 메우는 동안 무대 위에는 트렌치코트 깃을 세운 행인들이 무관심하게 무대를 바삐 오갔다. 곧 무대 밑에서 속옷만 입은 한 남자가 천천히 올라왔다. 최신 기계로 태닝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그는 미리 골라놓은 명품 옷을 입고, 명품 넥타이를 매고, 명품 구두를 신으면서 스스로 주문이라도 걸듯이 명품의 가치를 설파했다. 옷을 다 입은 후엔 관객을 향해 집 안의 최신 가전제품들 하나하나의 브랜드를 짚어가며 자랑했다. 그리고 자신을 소개했다. 뉴욕 증권가에서 일하는 26살의 패트릭 베이트먼. 그에겐 명품이 곧 자신의 존재 가치다.
첫 장면부터 노래나 춤이 아니라 대사로 입을 연 주인공은 이후로도 노래를 하기보다 말로 설명하는 일이 더 많았다. <아메리칸 싸이코>는 웅장한 넘버로 대표되는 노래 중심의 뮤지컬이 아니다. 연극처럼 느껴질 만큼 대사로 진행되는 장면이 많다. 휘황찬란한 조명과 화려한 전자음악은 대체로 배경에 깔리거나 쇼를 보여주는 가벼운 기능을 수행했고 사건은 주로 대사를 통해 전개됐다. 특히 패트릭 베이트먼은 그럴싸한 노래로 작품을 주도하기보다는, 오히려 종종 노래로 다른 배우들과 구별되는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뮤지컬 연기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맷 스미스가 주인공 캐릭터를 맡은 것이 단순한 스타 캐스팅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맷 스미스가 노래하는 목소리는 건조하고 냉소적이라서, 노래를 정식으로 배운 듯한 다른 배우들의 목소리와 확연하게 구분됐다. 발성부터 다르기 때문에 어디에도 진정으로 섞이지 못하고 자신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패트릭 베이트먼의 캐릭터를 잘 드러낸다. 반대로, 대사를 칠 때의 목소리는 강해서 대비를 이뤘다. 쉴 새 없이 대사와 혼잣말, 내레이션을 이어가면서 힘 있고 빠른 목소리로 극을 진행시켰다.
패트릭 베이트먼은 출근 전 비디오 가게에 들른다. 37번이나 빌려본 연쇄살인마 영화를 또 빌리고, 택시를 타고 월스트리트로 향하면서도 끊임없이 관객을 향해 말을 한다. 커다란 사무실에서 비서 진과 대화를 나누는 패트릭은 자신만만하고 당당해 보인다. 같은 증권가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만난 자리, 잘 빗어 넘긴 머리에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친구들은 다 비슷비슷한 스타일을 하고 있다. 호황이 이어지던 1980년대 뉴욕 증권가 청년들의 생활은 호화스럽고 방탕했다.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 나오는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좋은 옷, 좋은 구두와 금전적 여유, 번듯한 직업, 애인이 있어도 명품, 마약, 난잡한 성생활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무에 허우적대고 있다. 패트릭과 친구들은 으스대며 경쟁이라도 하듯 신상 명품을 자랑하고,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한다.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마주친 폴 오웬은 고만고만한 패트릭 무리보다 스타일도 좋고 더 좋은 직장에 다닌다. 패트릭은 폴한테 내심 위축됐어도 지지 않으려고 새로 만든 명함을 내밀지만, 친구들은 입을 모아 폴의 명함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는 간단한 마술 트릭을 이용해 남자들이 단체로 공중에서 명함을 뱅글뱅글 돌리는 모습을 표현했는데 진지한 그들의 모습이 더 우스꽝스러웠다. 노래가 끝나고 패트릭은 당당한 태도로 폴에게 인사를 건네지만, 대화를 하다 보니 폴이 자신을 마커스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패트릭은 굴하지 않고 폴을 여자 친구 에블린이 주최하는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자신보다 좋은 직장에 다니며, 자신보다 좋은 명함을 갖고 있고, 자신이 예약하지 못하는 레스토랑을 쉽게 예약할 수 있다고 말하는 폴. 패트릭이 믿고 있던 자신의 존재 가치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산산이 부서지는 현실

 

패트릭의 여자 친구 에블린과 친구들은 사치스러운 뉴요커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한껏 부풀린 머리를 뽐내고 명품을 찬양한다. 에블린은 패트릭을 자신을 빛내주는 액세서리라고 생각할 뿐 진심으로 패트릭을 배려해주지 않는다. 패트릭의 비서 진까지 합류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에블린은 손님들이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길 바라지만, 각자 자기 할 말만 하는 손님들 사이에서 패트릭이 갑자기 테이블에 올라가 파티에 어울리지도 않는 주제를 성토하기까지 하자 파티는 어색해지고, 에블린은 패트릭에게 화를 낸다. 생일 기분을 망친 패트릭은 친구 프라이스와 함께 클럽으로 향하는데 유난히 흥분한 상태였던 프라이스는 함께 클럽에서 코카인을 흡입한 후 갑자기 삶에 환멸을 느낀다며 사라져버린다. 프라이스와 같은 마음이었지만 자신을 잃을까 봐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한 패트릭은 이후 점차 현실감각을 잃고 부서져 간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면서 항상 자신 있고 당당하게 행동해왔지만 사실 그건 다 허세에 불과했고, 그런 현실에 지쳐갈 때쯤 친구의 돌발 행동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어느 날, 패트릭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노숙자에게 돈을 쥐어주다가 갑자기 그를 찔러 죽인다. 패트릭 베이트먼의 첫 살인이다. 패트릭은 에블린의 친구이자 루이스의 여자 친구인 코트니가 그간의 밀회 관계를 정리하자고 통보하자 체육관에서 루이스를 죽이려고 하지만 목을 조르려다가 키스하려고 했다는 오해를 받는다. 그리고 루이스는 패트릭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들이대기 시작한다. 한편 에블린은 완벽한 결혼식을 상상하며 패트릭을 독촉하고, 패트릭은 에블린을 죽이는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패트릭은 에블린을 죽이는 대신 다른 희생자를 찾아 나선다. 패트릭에게 살인은 일상이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취미였다.
크리스마스 파티 날, 패트릭은 멍청한 소리를 하는 에블린과 ‘우리 사이를 공개하자’고 들이대는 루이스 때문에 답답해져 심한 불안 증세를 보이고, 에블린에게 같이 나가자고 하지만 거절당한다. 결국 혼자 밖으로 나간 패트릭은 여전히 자신을 마커스라고 부르는 폴과 마주친다. 함께 폴의 집으로 간 패트릭은 문득 모든 사람이 세상에 꼭 필요한 건 아니며 누군가는 사라져주는 게 세상을 위해 더 좋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얀 우의를 입고 폴에게 다가간 패트릭은 자신의 살인 취미를 밝히고, 그를 살해한다. 도끼로 내리치고 전기톱으로 시신을 토막 내며 불안이 해소되는 걸 느낀다.
패트릭은 폴을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욕구가 충족됐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점점 살인 충동을 자제할 수 없게 된다. 연쇄살인과 일상생활을 병행하는 날들이 이어질수록 삶은 엉망진창이 된다. 패트릭은 에블린과의 약속을 깜빡깜빡하고 그가 사람을 죽이고 오느라 늦었다고 얘기해도 그녀는 그저 농담으로만 받아들인다. 계속 들이대는 루이스를 피하고, 사무실에선 비서 진의 도움을 받으며 패트릭의 이중생활은 위태롭게 이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폴의 실종을 수사하던 형사 킴벌이 찾아오고, 연쇄살인마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며 거의 꼬리를 잡았다는 말에 패트릭은 더욱 강렬한 불안을 느낀다. 도피 유혹에 에블린과 휴가를 떠났지만 패트릭은 여전히 아파트에 두고 온 시체들 생각뿐이다. 패트릭은 자신의 살인 충동에 대해 털어놓지만 에블린은 전혀 듣지 않고 결혼을 조르기만 한다.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온 패트릭은 여전히 들이대는 루이스에게 화를 내고, 루이스와 결혼하려 하는 코트니에게 결혼을 만류했다가 거절을 당한다. 패트릭은 그동안 꽤 가까워진 진을 집으로 초대하고, 죽이려 하지만 진이 사랑을 고백하자 살인을 포기하고 돌려보낸다.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진을 죽일 뻔한 패트릭은 마침내 산산이 부서진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이 사라지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킴벌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연쇄살인을 자백한다.

 

 

 

 

신 나는 음악에 녹인 그로테스크와 반전

 

<아메리칸 싸이코>의 제작진은 1980년대 환락이 지배하던 사회의 이야기를 2010년대 무대로 올리면서, 현대인이 공감할 수 있도록 허무를 키워드로 삼았다. 패트릭 베이트먼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요소를 다 갖췄지만 끝끝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허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이다. 계속 인정을 받으려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럴수록 아무에게도 어떤 인상도 남기지 못하고 희미하게 사라져간 그는 결국 공연 막바지에, 처음과는 매우 다른 목소리로 “나는 그저 거기에 없다”고 선언한다. 패트릭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해도, 살인을 고백하더라도 농담으로 주워섬기거나 못 들은 척 말을 돌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리를 높여 외치면 외칠수록 역설적으로 패트릭은 점차 희미해져 갔고, 그와 촘촘히 얽혀 있던 지인들은 그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적으로 살인을 묘사하여 그로테스크하고 어둡다는 평가를 받은 원작 소설과 달리 <아메리칸 싸이코>는 뮤지컬이란 장르에 맞게 잔인한 사건들을 재치 있고 세련되게 포장해서 표현했다. 덩컨 쉬크는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 이야기 전개와 음악을 분리했던 것과 비슷하게 <아메리칸 싸이코>에서도 사건 전개와 상관없이 쇼와 볼거리를 위해 음악을 사용했다. 강렬하면서도 신나는 클럽 사운드가 지루할 틈 없이 작품을 휘감고 있어 작품의 무게가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클럽을 연상시키는 원색의 화려한 조명들과 하얗기 때문에 더 차갑게 느껴지는 무대와 소품들이 어우러져 현실이라기보다 전위적인 예술 작품을 보는 듯했다. 무대 전환이 빨라 전개도 빠른 편이었지만 소설 속의 주요 장소와 사건들을 전부 담아내려고 욕심을 부렸는지, 굳이 장면을 할애해 저 짧은 대사를 집어넣어야 했나 싶은 장면들도 많았다. 함축적으로 표현하기보다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그대로 보여주려는 듯 상세히 설명해 나갔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코믹한 상황과 우스운 농담이 이어지면서 편하게 작품을 관람할 수 있었다.

 

 

 

패트릭 베이트먼은 계속 내레이션으로 자기변명을 하고 있어서 다른 작품에서 보던 연쇄살인마와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무서운 살인마나 통제 불능의 ‘싸이코’라기보다 현실에 불만이 가득한, 되는 일이 없어 안쓰러운 소시민 같다. 그리고 작품 전체가 패트릭의 입을 통해 설명되면서 철저하게 패트릭 베이트먼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패트릭이 형사에게 자백한 후 이어진 후반의 반전이 더 놀랍다. 뮤지컬치곤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책처럼 펼쳐놓은 연출이 헐겁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마지막 반전이 양념을 쳐준 덕분에 작품 전체의 미스터리가 살아나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아메리칸 싸이코>가 언젠가 국내 무대에 오를 수 있을까? 미국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이야기가 국내 관객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지만, 적나라하게 표현된 공연 속 장면들을 대체 어떻게 순화해서 표현할지도 궁금하다. 여담이지만 영국 관객들을 가장 웃겼던 건 혀를 굴리면서 전형적인 미국인을 연기하는 영국 배우들의 모습이었다. 과장된 ‘미국스러움’을 표현한 연출이 영국 배우, 무대, 관객을 만나면서 코믹한 시너지를 터뜨린 것이다. 문화적 차이까지 감안한 연출이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통하긴 확실히 통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7호 2014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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