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오래전 <모타운>이 뮤지컬로 제작된다는 소문을 들은 한국 독자들은 그 정체가 꽤 궁금했을 것이다. 다이애나 로스,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마이클 잭슨 등 수많은 팝 아티스트들을 키워낸, 미국 팝 프로듀싱의 산 역사 ‘모타운’. 대중적 흥행에 성공한 뮤지컬 영화 <드림걸즈>를 통해 모타운 레코드사는 흥미롭게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런 역사를 그대로 제목에 담은 <모타운>은 블록버스터의 냄새를 풍기며 기대감을 고조시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뚜껑을 열어본 작품은 여러모로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그 거대한 스케일과 참여 제작사의 화려한 크레디트에 걸맞지 않게 존재감이 없었다. 토니 어워드에서도 후보에 오른 네 부문에서 모두 수상에 실패했다. 흥미로운 재료와 풍부한 프로덕션 지원으로도 <모타운>이 이런 결과에 이른 이유는 무엇일까.
모타운과 베리 고디의 흥망성쇠 드라마
자동차 산업으로 유명하여 ‘모터 타운’이라고 불리던 디트로이트의 닉네임을 따와 만든 레코드사 ‘모타운’. 베리 고디 주니어는 가족 펀딩을 받아 회사를 설립하여 당시 소울(Soul) 음악을 하던 작곡가 스모키 로빈슨과 함께 음반 산업에 뛰어들게 된다. 베리 고디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그 시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소속 아프리칸-아메리칸 가수와 그들의 음악을 미디어에 노출시키고,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잭슨 파이브, 메리 웰즈, 슈프림스, 다이애나 로스 등 수많은 빅스타를 탄생시킨다. 그중 다이애나 로스와는 가정도 꾸렸지만 프로듀서와 스타의 관계로 다이애나를 컨트롤하려 했던 그의 태도 탓에 둘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음반 산업에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들이 등장하며 음악적으로나 사업적으로 대안을 찾지 못한 모타운은 다른 회사에 인수될 위기에 처한다. 그동안 모타운에서 스타가 된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겠노라 큰소리치며 다른 회사로 떠난다. 세무 조사는 베리 고디를 압박하고, 그는 점점 위기감을 느낀다. 결국 회사는 인수되고 말지만, 그가 배출해낸 위대한 아프리칸-아메리칸 뮤지션들은 모타운을 기억하는 기념 행사에 모두 참석해 과거의 영광을 되새긴다. 그들은 팝의 역사를 쓴 베리 고디에게 감사하며 다시 한마음이 된다.
장르의 특수성을 무시한 <모타운>
극에 쓰인 수많은 유명곡들을 듣다 보면, 모타운 레이블이 배출한 히트곡의 수에 새삼 놀라게 된다. 처음부터 모타운이 내세운 기치는 아프리칸-아메리칸이 노래하는 아프리칸-아메리칸 소울 음악을 백인들에게도 ‘먹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토를 증명하듯, 뮤지컬의 거의 모든 출연진은 아프리칸-아메리칸 배우들이다. 음악들은 모두 몇십 년간 쌓인 모타운의 히트곡이며, 전 세계에서 사랑받은 친숙한 노래들이다. 한마디로 <모타운>은 모타운의 노래로 모타운의 역사를 보여주는 주크박스 뮤지컬인 셈이다.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특징은 모타운의 창업자이자 프로듀서 베리 고디가 직접 각본을 썼다는 점이다. 내용 자체가 ‘모타운과 베리 고디의 인생굴곡’에 대한 이야기인지라 일단 흥미를 끈다. 남의 손으로 프로듀싱된 영화 <드림걸즈>가 흥행하는 걸 보고 나서야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써야겠다고 작정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자서전을 쓰는 대신 뮤지컬로 인생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스케일이 다른 프로듀서라는 인상이 전해졌다.
그러나 극본을 보면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작품의 대의를 위해서라면 내려놓는 지혜도 필요하다. 브로드웨이에서 히트하기란 전문 극작가, 작곡가들에게도 어렵다. 그런데 자기 이야기이니까 가장 잘 안다는 생각으로 대본까지 직접 쓴 건 좀 무모했던 듯싶다. 제삼자가 썼더라면 허구도 보태며 흥미를 키웠겠지만, 베리 고디는 극적인 재미보다는 체면을 더 생각한 것 같다. 아마 그는 극본을 쓰는 것도 음악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거나, 극본의 부족한 점을 좋은 음악들이 메워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듣기 좋은 팝도 뮤지컬에 차용되는 순간, 뮤지컬적인 언어나 장르에 적합한 형식으로 편곡되어야 한다. 그런데 <모타운>은 레이블의 수백 개 히트곡 중 무려 60여 곡이 넘버로 쓰이고, 반복되는 곡도 없다. 140분짜리 뮤지컬에 반복 없이 60여 곡이라니, 숨 막히는 느낌이다. 이렇다 할 응집된 사건과 해소도 없고, 단 한 번의 음악적 공백 없이 시간순으로 전개되는 내용은 지루할 수밖에 없다. 수시로 바뀌는 비효율적인 무대 전환도 관객으로 하여금 제작비를 걱정하게 만든다.
영화와 뮤지컬은 한정된 시간 동안 관객을 계속 유혹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에디팅 과정이 있는 것이다. 관객의 지적 수준을 감안해, 설명과 비약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결국은 ‘덜어내기’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다. <모타운>의 지루함은 전반적으로 극과 넘버 구성에서 이 ‘덜어내기’를 실패한 데서 비롯된다. 모든 노래가 비슷한 미디엄 템포에 R&B, 소울이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지쳐가는 것이다. 병렬식 전개에 비슷한 음악과 비슷한 음색의 가수들. 이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정석과는 거리가 있다.
좋은 작가는 감정의 마지막 한 올까지 놓치지 않고 끝까지 원하는 느낌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다. 고디의 인생은 분명 극적이지만, 그것을 극으로 생생히 옮겨놓는 테크닉은 부족했다. 이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특수성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물론 작품에 직접 투자하고 위험부담도 감수했으니 할 말은 없지만, ‘나 아니면 안 된다’라는 마인드를 버릴 때 작품이 나아질 가능성이 커지는 건 사실이다. 뮤지컬에 대한 존중을 거의 느낄 수 없었던 이 작품은 장르 팬으로서 섭섭함마저 느끼게 했다. 그들은 ‘뮤지컬’을 만들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단지 뮤지컬이란 장르를 이용해보고 싶었던 걸까.
흔치 않은 역사의 재현과 실패
이 에피소드를 공개해도 될까 오랫동안 생각했는데, 어떤 편견 없이 시장 현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차원에서 필자의 경험담을 나누어보고자 하니, 독자 여러분도 열린 마음으로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필자는 얼마 전 브로드웨이의 음악감독 워크숍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위키드> 지휘자와 함께 브로드웨이 공연장 오케스트라 피트를 찾았다. 공연 전 백스테이지에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는데, 그중 한 연주자가 굉장히 반가운 얼굴로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안녕! 나는 흑인이에요!” 순간, 주변에는 어색한 공기가 감지됐고 필자는 순간적 재치를 발휘해 이렇게 대답했다. “안녕! 나는 황인인데요!” 그러자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며 분위기는 다행히 풀어질 수 있었다.
그 연주자는 왜 이름보다 굳이 ‘나는 흑인’이라는 말을 먼저 꺼냈을까? 뮤지컬은 백스테이지마저도 뼛속까지 백인의 비율이 월등한 장르이다. 유감이긴 해도 사실이다. 마치 아프리칸-아메리칸들에게는 랩이나 그래피티 같은 힙합 문화가 있는 것과 비슷하다. 오리지널 작품을 ‘창조’해 브로드웨이에 올리는 건, 서양인 중에서도 극소수의 백인들이다. 우리가 창작뮤지컬을 아무리 열심히 만든다 한들 라이선스 뮤지컬에 뒤처지고, 분하지만 노하우와 규모 면에서도 늘 밀리는 게 현실이다. 뮤지컬은 런던이나 뉴욕 등지의 백인들이 오래전부터 개척해왔기 때문에 그들이 선호하는 양식이나 문화적 배경이 녹아들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만든 무대의 전통도 생겨났다. 게다가 편의상 그들의 인맥으로 운용되다 보니 차츰 폐쇄적인 성향을 띠게 됐다. 물론 그것은 의도적인 시장 점유가 아니라, 효율적인 네트워킹과 커뮤니케이션의 선택 결과일 뿐이다.
필자에게 인상적인 인사를 했던 그 연주자 역시, 아니나 다를까 오케스트라의 유일한 아프리칸-아메리칸이었다. 자신이 혼자 유색인종이란 사실을 의식하고 있던 그는 ‘유색인종’이 반가웠던 모양이다. 필자 역시 프로그램에 선발된 열 명의 지휘자 중 유일한 유색인종, 동양인이었던 터라 그의 마음이 이해되기도 했다. 어쨌든 핵심은 뮤지컬은 이처럼 백인의 관점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고, 관객 역시 백인이 훨씬 많은 장르라는 사실이다.
<모타운>의 의미를 찾는다면 이런 뮤지컬 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데 있다. 몇십 년 전 베리 고디가 백인의 전유물이었던 레코드 시장에 도전해 당당히 승리한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음악으로 모든 인류를 하나 되게 한 모타운의 공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런 정신을 다시 실현하려고 했던 베리 고디와 크루들, 투자자들 모두 그 자체로 존중받을 만하다. 이 살아있는 역사의 이야기는 정말 가치 있는 소재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모타운이 아니었다면 빛을 못 봤을 훌륭한 소울 음악들과 가수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 쇼를 만든 이들이 의미 있는 일을 한 것만은 불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솔이 철철 넘치는 이 배우들이 ‘뮤지컬 무대’를 잘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군무와 합창이 딱딱 들어맞는 데서 오는 쾌감보다는, 각자 충만한 감정을 표현하기에 바빴다. 깔끔한 전환과 계획된 연출 아래 컨트롤되는 무대 예술의 아름다움을 즐기던 필자에게, 그것은 어떤 불편한 감정을 안겨주었다. 뿜어져 나오는 소울을 통제하지 않는 가수들의 열창은 뮤지컬 무대에서는 단지 산만하게만 들릴 뿐이었다. 그것은 뮤지컬이라기보다 <아메리칸즈 갓 탤런트>에서 볼 수 있는 솔 싱어들의 합동 무대 같았다.
대중은 정말 진실한가?
이 작품을 통해, ‘대중은 정말 진실한가’에 대해 강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을 알아본다’라는 말도 있지만, 집단 최면(?)에 걸리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 같다.
첫째, 다이애나 로스 역의 배우는 이제껏 필자가 봐온 사람 중 가장 실력이 의심스러운 인물이었다. 이 정도로 미완성의 배우가 브로드웨이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특히 B와 C음은 잘못된 발성 때문에 모든 넘버에서 심하게 음이 떨어졌다. 이건 필자가 특별히 예민한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거슬릴 만한 수준이었다. 처음엔 설정상 노래 실력이 부족한 초반부의 디테일을 감안한 것인가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다이애나 로스와 비슷한 건 음색뿐이었지만 관객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단지 나훈아 노래를 듣고 싶은 관객들 앞에 너훈아가 나왔을 때 모든 게 이해되는 것처럼, 그저 다이애나 로스 캐릭터가 무대에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열광적이었다. 이들에게 이 넘버들은 자신들의 소울과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이미 그 사실 하나로 무비판적이 된 듯했다.
둘째, 극이 전반적으로 일정 수준에 도달치 못하였다. 중·소극장은 관객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에너지가 중요하고, 그걸 느끼려 일부러 중·소극장 작품을 챙겨보는 관객도 있다. 그러나 이건 브로드웨이 대극장 작품이다. 아무리 R&B라고 해도 애드리브 같은 연기는 왠지 불편하다. 스테이지와 일정 거리를 두고 ‘작품’을 보고 싶은 관객들의 심리적 공간에 거리상으로 멀리 있는 배우가 들어오려고 노력하는 순간, 그 에너지를 전달받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사라 장이 그렇게 수년간 바이올린 연주를 ‘기똥차게’ 해왔어도 단 한 번 슬럼프에 빠졌다고 느낀 순간, 관객들은 야박하다 싶을 정도로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이제 정반대의 상황이 브로드웨이에서 연출되고 있다. 이것이 문화 향유에 트레이닝이 된 업타운 관객들과 관광객+대중의 차이인가도 싶다.
평론가들도 미국 팝의 역사를 쓴 베리 고디가 쓴 대본을 감히 맘껏 비판할 엄두가 안 나서 비교적 얌전하게 평을 한 것 같다. 뮤지컬에 관심이 별로 없는 뉴스 매체 담당자들도 이 작품이 브로드웨이에 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뮤지컬계의 블록버스터가 떴다! 꼭 봐야 할 뮤지컬!’이라고 안전한 광고성 기사를 낼 게 분명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런던, 뉴욕에 있지 않은 제3세계(?) 리포터들 정도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언론과 평단의 평가와 무관하게 <모타운>이 주는 교훈은 분명히 있다. 뮤지컬은 역시 종합예술이라는 사실이다. 창작 과정부터 무대까지, 각자의 출중한 능력을 발휘해 최고의 작품을 만든다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달려가는 것이다. 가끔 무시무시한 천재가 나와 뮤지컬에 모든 재능과 관심을 쏟아붓는다면 엄청난 작품이 나오기도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 사람이 혼자 너무 많은 역할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모타운>은 그걸 온몸으로 보여줬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3호 2013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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