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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NEW YORK] 아메리칸 드림에 대하여 <핸즈 온 어 하드보디> [No.115]

글 |정예경(뉴욕 통신원) 사진 |Kevin Berne 2013-04-30 3,952

연극이 활기를 띠고 뮤지컬은 다소 주춤하던 지난 시즌이 지나면서 브로드웨이에도 봄바람이 불고 있다. <핸즈 온 어 하드보디>, <킨키 부츠>, <신데렐라> 등의 작품들이 프리뷰 공연 중이다. 또 조금만 기다리면 <마틸다>, <빅 피시>, <모타운> 등 기대작들도 선보이니 이번 상반기 브로드웨이는 작년에 비해 풍성한 분위기일 듯싶다.
하지만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그로 인한 불안 탓인지, 최근 작품들은 다소 현실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핸즈 온 어 하드보디>와 <킨키 부츠>의 경우 둘 다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화된 바 있으며, 보통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녹여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이번에 다룰 <핸즈 온 어 하드보디>는 1997년 LA의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으로, 기인 열전 정도로 치부될 뻔했던 한 이벤트를 ‘인간’이란 존재에 초점을 맞춰 재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드보디’와 아메리칸 드림                                               

미국 텍사스. 10명의 사람들이 ‘닛산 픽업트럭’이 부상으로 걸린 경기를 위해 한자리에 모여든다. 그 경기란 바로 ‘트럭에 제일 오래 손대고 있기’를 겨루는 시합이다. 기대거나 손을 떼면 바로 탈락. ‘하드보디’는 바로 트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모여든 사람들의 배경과 사연도 다 제각각인데, 지루하고 힘들게 서 있는 며칠 동안 그 사연이 하나씩 드러난다.
미국에서 ‘차’의 의미는 우리나라와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차는 생필품이라기보단 ‘어떤 차를 타느냐’에 따라 계급이 결정되는 부의 상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반면 광활한 미대륙에 사는 시골 사람들에게 ‘픽업트럭’이란 미국인의 자존심을 의미한다. 뉴욕 같은 도시는 조금만 외곽 쪽으로 나가도 도로에 사슴이 출몰하는 건 다반사고 가끔 곰도 나타날 정도로 위험하다. 눈비라도 오는 날이면 상상할 수 없는 규모로 몰아치며, 마을 중심가로 가야 볼 수 있는 마트나 몰은 총기 사고나 괴한으로부터의 안전을 위해 9시 전에 문을 다 닫는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의 등하교와 생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픽업트럭이다. 단지 겉치레를 위한 럭셔리 품목이 아니라 자연을 개척하는 데 필요하고, 삶의 고난을 함께 견뎌내야 하는 친구 같은 존재인 것이다(유독 미국 시골 사람들이 픽업트럭에 열광하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이런 미국 시골 사람들, 특히 집 한 채도 못 가진 사람들에게 ‘핸즈 온 어 하드보디’ 대회는 말하자면 로또 같은 기회다. 각양각색의 사연을 지닌 사람들은 저마다 픽업트럭이 상징하는 자신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투지를 불태운다. 아이들을 트럭으로 등하교시키고 싶어서 나온 여자, 남편의 열렬한 후원에 힘입어 출전한 중년 여인, 수술 후 약해진 자신의 모습이 싫어서 자기에 대한 도전으로 출전한 남자, 영주권 없이 직장을 다니며 근근이 살아가는 스페인 남자, 스턴트맨이 되고 싶은 남자, UPS(United Parcel Service, 세계적 물류 운송 업체)에서 일하는 여자, 전형적인 남부 사람…. 이렇게 다양한 출전자들은 저마다 사연을 지닌 채 진지하게 경기에 나선다.
반면 주최자들은 이 이벤트를 재밋거리로 여길 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은 자신들의 대회와 스폰서들이 광고되고 있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가진다. 심지어 남자 진행 위원은 출전자 중 예쁜 금발 여자에게 은밀한 제안을 하며 반칙을 봐주기도 한다. 이에 정의롭고 따지기 좋아하는 아주머니 캐릭터는 이따위 경기는 나올 필요가 없다고 분개하며 기권해버린다. 남자 심사 위원에게 몰래 약물을 받아먹고 버티던 금발 여자는 시치미를 떼지만, 곧 그 약도 마음대로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스스로 나가버린다. 경기 도중 눈이 맞은 남녀는 여자가 더 버티지 못하고 넋이 나간 채 관객석으로 퇴장하자, 그녀가 걱정된 남자 역시 뒤따라 달려 나간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려던 스페인 남자는 집에 두고 온 개가 걱정된다며 기권한다. 가스펠을 부르며 충만한 성령의 힘(?)으로 최종 3인 안에 들 때까지 버틴 여자는 지나치게 접신한 까닭에 자기도 모르게 손을 떼게 되어 허무하게 탈락한다. 이런 식으로 한 사람씩 퇴장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91시간을 버틴 남자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픽업트럭 열쇠를 손에 쥔다.
결국 이 작품은 ‘아메리칸 드림’이 무엇인지 아주 정확히 말해주는 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간절히 원하면서 배짱을 가지고 버텨내면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드림’이다. 동시에 트럭이 없으면 쇼핑, 출퇴근 등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중 무엇하나 하기 어려운 텍사스, 그야말로 너무도 미국적인 배경에서 살아가는 ‘아메리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작품에서 미국적인 색채가 진하게 배어 나오는 것은 이 열 사람들의 개성과 배경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비가 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훌륭한 작가가 극본을 집필했기에 캐릭터가 잘 살아있기 때문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기본적으로 미국이 다문화, 다인종 사회였기 때문에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진정성으로 전형성을 넘은 극본                                           

토니 연극 부문, 퓰리처 어워드 수상 작가인 덕 라이트는 이 작품이 브로드웨이로 올 수 있게 한 일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언뜻 생각해봐도 ‘차에서 제일 먼저 손 떼기’도 아니고 ‘제일 오래 손대기’를 무대화하기란 연출가에게 여간 어려운 숙제가 아니다. 움직임과 안무의 반경이 심각하게 제한되어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안무가와 연출가에게는 큰 도전이다. 그런데도 시니컬하지만 결코 차갑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맛깔난 대사로 풀어내어 지루한 느낌 없이 이야기를 전개한 것은 정말 큰 재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극의 가장 큰 특징은 별다른 사건이 뚜렷하게 일어나지 않는, 클라이맥스 없는 ‘병렬식 구성’으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이런 구성이 극에는 최악의 방식이라는 것은 극작 교과서에도 나와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에피소드들의 나열로만 이야기가 전개되는 작품들을 보면 회의감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작가의 재능이 그런 전형성의 한계마저도 거뜬히 뛰어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다. ‘열 사람이 나와 자기의 얘기를 하고 들어간다’라는, 태생적으로 산만한 구조의 문제를 안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점이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그가 열 사람을 통해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란 바로 ‘우리는 공동의 목표를 가졌다. 그리고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다’라는,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휴먼 드라마이다. 이 핵심이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한, 사실 마지막에 누가 남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한 사람이 빠져나갈 때마다, ‘잘 버텼다’라는 응원의 박수 소리가 극장 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란 도시에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어딜 가나 먹고사는 일은 인간의 일상적인 문제이며, ‘최소한 직장은 있었으면’, ‘최소한 아이들에게 이것은 해줄 수 있었으면’ 등의 바람은 시공을 초월해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공감을 얻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극적인 요소가 너무 강했던 탓인지 연극에 음악을 많이 입히고 안무를 넣은 극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극 자체의 형식과 전개를 포함해 대본 자체가 참 좋았지만, ‘뮤지컬’로서 좋았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균형을 잃은 음악의 아쉬움                                                 

극본과 찰떡궁합을 이루는 건 재미있는 가사들이었다. <브링 잇 온>의 톡톡 튀는 가사를 썼던 아만다 그린의 재능이 한껏 발휘되었다. 반면 음악은 필자가 지금껏 봐왔던 수많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중에서 평균에도 들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작곡가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이 작품의 음악 문제는 창작자 간의 힘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극작가, 작사가, 작곡가는 연출가가 작품에 들어와 제2의 창작에 들어가기 전에 작품에 대해 한 몸처럼 서로 충분한 이해를 하고, 각자의 역량이 가장 높이 발휘될 수 있도록 서로 서포트를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뮤지컬’이기 때문에, 극본과 음악이 다소 시간 차는 있더라도 동시간대에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음악이 너무 나중에 들어왔다. 극작과 가사가 많이 진행된 뒤에 작곡을 하게 되어 뮤지컬의 음악적 형식을 살리기 어려웠던 것이다. 극작에 음악이 종속되는 순간, 뮤지컬의 매력은 사라진다. 그런 형식이라면 아마도 연극이나 영화가 적당할 것이다. 게다가 작사가가 작곡에 참여를 했다고 하는데, 때론 이게 독이 될 수도 있다. 지나치게 말의 아름다움이나 재미를 살리려다 보면, 작곡가가 선율로 사람들의 가슴을 때려줄 수 있는 감각적인 부분이 사라진다. 작사가는 작곡에 참여하되 가끔은 욕심을 버리고 물러설 때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건 정말 뮤지컬이라기엔 음악이 거세되어도 너무 된 듯싶다.
넘버는 꽤 많았다. 가스펠, 펑크, 블루스 등의 장르가 혼합되어 인물마다 독창의 넘버가 하나씩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심하게 ‘브룩클린-인디’적인 분위기는 정말 어쩔 건가 싶었다. 작곡가는 록 밴드에서 활동하는 사람인데, 뮤지컬에 대한 이해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 작가들을 설득하는 데도 실패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했다. 아니면 극작가, 작사가 모두 브로드웨이 대작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 이 신출내기 뮤지컬 작곡가가 목소리를 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음악이 같은 톤, 비슷한 분위기, 각 장면마다 팝송을 넣어놓은 듯한 병렬식 구성에 휘둘렸다. 소규모 콘서트장의 인디 팝이었고, 그 초라함은 안쓰러웠다. 다행히도 가스펠을 부른 배우의 재능이 매우 출중해 본인의 충만한 소울로 빈 부분을 채워줄 수 있었다.
이것이 프로듀서가 원한 것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극작가는 역량 있는 사람을 영입한 반면 신출내기 작곡가에게는 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란 기회 외의 다른 것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가령 그의 부족한 경험을 채워주거나 지원할 수 있는 강력한 뮤직 에디터를 영입했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모든 극 중 캐릭터가 독특하긴 했지만, 그런 특징이 단지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음악적인 요소와 결합되어 나타날 때 뮤지컬로서의 의미가 있다. 공고하게 다져진 극 중 캐릭터를 설명해주기엔 음악적 개성이 너무 약했다는 말이다.
결국 이에 대해 창작자 세 명은 똑같이 책임이 있을 듯하다. 서로를 보조해주는 것도 자기의 일을 잘하는 것만큼이나 작품 전체의 질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의 뚜렷한 개성을 살리되, 서로의 재능에 의존하거나 상대방의 재능을 가려서는 안 된다. 이런 미묘하고 섬세한 협업으로 만드는 장르가 뮤지컬이고, 이것이 성공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소박한 무대, 실감 나는 연출과 연기

빈티가 나는 세트였다. 그런데 그건 아마 예산 때문이 아니라 의도된 설정일 것이다. 텍사스 시골 마을, 낮의 땡볕, 밤 모기, 모래바람 등을 참아가며 버티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반짝반짝한 브로드웨이 무대는 안 어울리니까(만약 뮤지컬 전문 작가가 집필했거나 디즈니사 정도가 프로듀싱을 했다면, 스토리와 별개로 휘황찬란한 장면이 나오게끔 꾸몄을 것이다. <뉴시스>처럼…). 그래서인지 오프브로드웨이 느낌이 너무 강했다. 노래의 느낌도 인디적이고, 세트 전환은 한번도 없다. 만약 오프브로드웨이의 좀 더 작은 규모의 극장에서 공연했다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연출은 이 한정된 상황 속에서도 상당히 꾀를 잘 냈다. 회전무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점이 특히 그렇다. 사람들이 손을 차에 붙인 상태에서 차가 돌아가면, 각자 맡은 솔로 부분이 나올 때 차가 정지하도록 정확히 계산해 안무를 짰다. 또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면서 각자의 과거 이야기를 할 때는 잠시 손을 떼기도 하는데, 노래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면 손을 떼버린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퇴장을 하는 식의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상당히 재미있게 느껴졌던 부분은 이 극이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만큼 배우들이 죄다 ‘보통 사람’ 코스튬 플레이(?)를 제대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찌나 다들 배우의 아우라가 없는지, 죄다 옆집 아주머니나 아저씨를 그대로 무대에 옮겨놓은 것 같았다. 그나마 예쁘다는 금발 여자도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 ‘동네에서 좀 예쁜 애’ 정도로 그려진다. 배우로서의 존재감, 아우라를 감추는 것도 연기라면, 이들은 정말 대단한 연기력을 보여줬다. 멋있게 보이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자기가 맡은 ‘길 위의 사람’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모든 배우는 나중에는 정말 멋지게 보였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도 바로 옆 극장에 가서 신데렐라 역할을 맡으면 정말 신데렐라로 보인다는 점! 이것이 바로 무대예술의 가장 큰 매력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 세계에 한번 빠지면 못 헤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적인 것에 대한 단상                                                   

보통 브로드웨이 쇼들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픈하고 월요일에 쉰다. 그런데 프리뷰 기간이라 업계 관계자들을 초청하기 위해 이 작품은 월요일에 오픈하고 일요일에 쉬는 형태다. 그 덕에 옆 공연장에서 공연하는 배우들도 월요일에 마실을 나와 이 공연을 보러 왔다. 지난달 <신데렐라> 프리뷰에서 언급했던 배우 앤 하라다도 곱게 차려입고 마실을 나왔다. 그 무대에서 심술 맞은 양언니였던 그녀는 대화를 나눠보니 실제로는 약간 일본인 특유의 수줍음을 타는, 실물이 더 아름다운 배우였다. 문득 동양계 미국인인 그녀에게 완벽히 미국적인 이 이야기는 어떻게 비쳤을지 살짝 궁금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5호 2013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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