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뮤지컬계는 연말에 오픈한 <보디가드>와 <비바 포에버> 등 영국산 주크박스 뮤지컬들이 팬들의 응원에 힘입어 선전하는 가운데, 브로드웨이에서 건너온 화제작들 <코러스 라인>과 <북 오브 몰몬>, <원스> 등으로 2013년 초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이러한 연말연시 대형 뮤지컬들의 마케팅 전쟁에 아랑곳없이, 런던의 소극장 메니어 초콜릿 팩토리는 늘 하던 대로 잘 알려지지 않은 뮤지컬을 조용히 부활 시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바로 1981년 브로드웨이 실패작으로 알려진 손드하임의 <메릴리 위 롤 어롱(Merrily We Roll Along)>이란 작품으로, 소박한 소극장 무대를 통해 연말연시 매진 사례의 신화를 이루고 있다.
손드하임 작품들을 세계적인 성공작으로 가꾼 마법의 팩토리
메니어 초콜릿 팩토리는 꾸준히 손드하임의 뮤지컬 작품들, <일요일 공원에서 조지와 함께>(2005)와 <소야곡>(2008), <로드쇼>(2011) 등을 선보여왔다. 영국 배우 다니엘 에반스가 선전했던 <일요일 공원에서 조지와 함께>, 그리고 영국의 노장 연출가 트레버 넌이 크게 공을 들인 <소야곡> 같은 메니어 초콜릿 팩토리의 프로덕션들은 작품성을 크게 인정받아 런던 웨스트엔드뿐만 아니라 미국 브로드웨이로까지 영국산 프로덕션을 역수출한 바 있다. 이번에 메니어에서 선보이는 <메릴리 위 롤 어롱>은 영국에서만 세 번째 리바이벌되는 공연이다.
<메릴리 위 롤 어롱>은 1981년 브로드웨이 초연이 16회 만에 막을 내리면서 손드하임이 공연계를 떠나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게 만든 대표적인 실패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는 1994년 오프브로드웨이 리바이벌과 몇 번의 짧은 지방 프로덕션, 그리고 콘서트 버전이 시도된 바 있을 뿐이다. 반면, 영국에서는 2000년 돈마 웨어하우스의 예술감독이자 유명 연출가인 마이클 그랑다지가 직접 연출하여, 올리비에 연극상의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하여 세 개 부문을 석권하면서 손드하임과 이 작품의 명성을 되찾아주었다. 그리고 손드하임의 또 다른 작품인 <스위니 토드>의 액터-뮤지션 버전으로 유명한 연출가 존 도일이 2008년에 역시 액터-뮤지션 버전으로 이 작품을 연출했다. 당시 영국 워터밀 극장에서 크게 인기를 얻은 후 미국 투어까지 감행하기도 했다. 그에 이어 영국에서의 세 번째 주요 리바이벌인 이번 메니어 초콜릿 팩토리의 공연은 1992년에 영국의 지역 극장인 레스터의 헤이마켓 극장 프로덕션에 출연했던 여배우 마리아 프리드먼이 연출가로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마리아 프리드먼은 영국 내 최고 뮤지컬 배우 중 한 명으로, 대표적인 여성 프로듀서 소니아 프리드먼의 언니로도 유명하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우먼 인 화이트>에서는 소니아 프리드먼이 제작을 맡고, 마리아 프리드먼이 여주인공으로 맹활약한 바 있다. 이제까지 메니어 초콜릿 팩토리의 성공작들을 차례로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로 진출시키는 상업 프로듀서 역할을 하고 있는 이가 바로 소니아 프리드먼이기에, 언니가 연출한 이번 프로덕션을 동생의 힘으로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로 진출시킬 작정을 하고 시작한 것이 아닌가 예상하게 된다.
작은 무대를 가득 채우는 대형 프로덕션
그래서인지 초콜릿 팩토리의 소극장 무대에는 유난히 많은 배우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 뮤지컬 넘버이자 주제곡인 ‘Merrily We Roll Along’이 시작되면서, 하나둘씩 등장하는 캐스트가 어느덧 열넷, 열다섯 명을 넘어서면, 200석 남짓의 소극장 무대에 이렇게 많은 출연자가 동원된 것이 놀랍기만 하다. 유명 배우 마리아 프리드먼의 연출가 데뷔 작품이어서, 오랫동안 동료로 활약해온 탁월한 실력의 중견 배우들이 대거 참여한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소극장 작품에 이렇게 유명한 배우가 많이 등장한 것은 처음인 듯하다. 남자 주인공 프랭클린 역의 마크 엄버스는 영국 국립극장의 <마이 페어 레이디>를 비롯해 수많은 주요 연극에 출연해 온 베테랑 미남 배우이고, 그의 오랜 친구 매리 역을 맡아 열연하는 여배우 제나 러셀은 영국에서 공연되는 손드하임 작품에 자주 출연하는 몇 안 되는 실력파 여배우이다. <숲 속으로>의 런던 리전트 파크 프로덕션에서 베이커의 아내를, <일요일 공원에서 조지와 함께>의 웨스트엔드 프로덕션에서 쉐라의 여자 친구인 도트 역을 맡아 올리비에 연극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바 있다. 프랭클린의 또 다른 친구인 찰리 역의 데미언 험블리 역시 최근 셰필드 극장에 오른 손드하임의 작품 <컴퍼니>에 출연한 바 있으며, 런던에서 개막한 <테너 한 명만 빌려줘(Lend Me a Tenor)>에서 열연했던 실력파 배우이다. 이외에도 전 부인 베스 역의 클레어 포스터는 얼마 전까지 <크레이지 포 유>에서 톰보이 같은 여자 주인공으로 맹활약했고, 두 번째 부인 거시 역의 조세피나 가브리엘레는 <스위트 채러티>, <헬로우 돌리!>, <39계단> 등 런던의 주요 무대에서 여주인공으로 활약해온 미모의 여배우이다.
이렇게 대형 배우들을 작은 무대에 모아 놓은 이번 공연에는 출연자들의 에너지가 지나칠 정도로 폭발적이다. 20여 년 연기 경력을 바탕으로, 어떤 연출가보다도 연기에 중점을 두었을 마리아 프리드먼의 연출은, 그래서 등장인물들의 연기력과 에너지 발산에 초점을 둔 듯하다. 초반에 등장인물들 간의 사연을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게 지나치게 갈등이 첨예화될 때, 소극장 무대여서인지 관객으로서 조금 부담스러운 순간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배우들 간의 앙상블이 균형을 찾아가고 스토리의 디테일이 드러나면서, 알수록 점점 재미있어지는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마리아 프리드먼은 창문 몇 개와 피아노 한 대만을 주요 무대 장치로 사용하면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1960~1970년대의 화려한 디자인과 색상의 의상으로 시선을 모았다. 다자인을 맡은 수트라 길모어는 여성 인물들의 개성 있는 드레스를 여럿 선보이며 패션 감각을 발휘했다. 댄스 곡이 거의 없는 소극장 버전에서 안무가 팀 잭슨의 역량을 확인할 길이 별로 없었지만, 혹시 웨스트엔드 대형 극장으로 이전될 경우 어떤 그림이 만들어질지 궁금하기도 했다.
관계의 역사를 거꾸로 짚어가는 원조 뮤지컬
<메릴리 위 롤 어롱>은 1976년 성공 가도를 달리는 할리우드의 제작자 프랭클린 셰퍼드와 그의 성공에 걸림돌이 되는 듯이 보이는 주변 인물들을 다룬 뮤지컬 코미디이다. 외모나 능력 모두 훌륭해 보이는 프랭클린은 추종자가 아주 많아 보이는 매력적인 남성이다. 아직 젊어 보이는 그는 최근 제작한 영화가 잘되어 한창 파티 중인 듯한데, 친한 친구이자 작가라고 하는 매리라는 여자가 잔뜩 취해서 손님들 앞에서 프랭크와 그의 영화에 대한 욕을 있는 대로 늘어놓는다. 한편 이혼 소송 중이라는 아내는 파티에 온 여자 손님에게 볼썽사나운 공격성을 드러내고, 재산 싸움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소개된다. 한때 뮤지컬을 함께 만들었다는 작사가 친구 찰리는 TV 인터뷰에서 프랭클린의 욕을 있는 대로 늘어놓는 추태를 일삼는다. 잘 생기고 호인인 듯한 프랭클린은 왜 이렇게 이상한 친구들에게 엮인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렇게 한 해, 두 해 과거로 돌아가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현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짜증스럽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등장인물들이, 알고 보면 아주 젊어서부터 생사고락을 같이한 진정한 친구이자 예술적 동반자들이었다는 것, 오히려 그들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야망에 눈먼 프랭클린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래서 <메릴리 위 롤 어롱>은 양파 껍질을 까듯이 하나하나 알고 보면 볼수록 재미있고 감동이 있는 특이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1장보다는 2장이, 1막보다는 2막이 더 재미있고, 프랭크와 매리와 찰리와 베스, 모두가 순수하고 어렸던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장면이 가장 감동적인 뮤지컬이다.
의도적으로 힘이 들어간 연출과 2% 넘치는 열연
앞서도 언급했지만 마리아 프리드먼의 연출은 배우들의 에너지를 초반에 너무 증폭시켰고, 이로 인해 힘이 너무 들어간 듯 보였다. 특히 초반에는 오버액팅이 난무했고, 다들 목소리가 너무 컸으며, 디테일이 없는 나쁜 연출의 표본으로까지 보였다. 그러나 이는 세부적인 인물과 그들의 관계가 소개되기 이전에 의도적으로 갈등을 전면에 내세우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 같다. 초반에 불편하리만큼 힘만 넘치던 배우들의 열연은 중반으로 접어들자, 스토리의 디테일이 밝혀지면서 균형미를 찾아가는 듯했다. 특히, 주인공 프랭클린과 친구 찰리, 매리를 맡은 세 배우, 마크 엄버스와 제나 러셀, 데미안 험블리의 앙상블은 가난하고 무명이었던 젊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아름다운 우정을 선보인다. 첫 번째 부인인 베스 역의 클레어 포스터와 둘째 부인이자 프랭클린을 상업 프로듀서로 타락시킨 거시 역의 조세피나 가브리엘레에게서는 악처로서의 비열한 겉모습 속에, 한때 진정한 사랑을 나누었던 인물의 따스함이 점차 드러난다. 그래서 첫 번째 부인 베스가 부르는 ‘Not a Day Goes By’는 아련한 추억과 상처가 담긴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낸다. 2막 시작의 극중극 부분에서 코러스들이 하얀 깃털을 들고 백코러스를 하는 가운데 두 번째 부인 거시가 탭 댄스를 곁들여 부르는 ‘Musical Husband’s Finale’는 조세피나 가브리엘레의 미모와 가창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손드하임의 대표적인 음악적 스타일이 돋보이는 작품
단순하고 반복적인 스타카토 형식으로 시작하고 불협화음으로 발전하며 복잡해지다가 이내 멜로디 부분이 발전하면서 더욱 풍부한 선율로 아름답게 펼쳐지는 익숙한 음악, 바로 손드하임 스타일의 음악을 <메릴리 위 롤 어롱>에서 만날 수 있다. 첫 번째 뮤지컬 넘버이자,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장소와 상황이 바뀔 때마다 컴퍼니 전체가 리프라이즈로 노래하는 ‘Merrily We Roll Along’이 바로 그런 예이다. 또한 주인공 프랭클린과 특별한 우정을 나눈 친구들, 매리와 찰리가 부르는 ‘Old Friends’ 역시 단순한 스타카토로 시작했다가 뒤로 가면서 색소폰의 향수 어린 선율이 어우러지는 대표곡이다. 이 밖에도 찰리가 야망에 눈먼 프랭클린을 비난하며 부르는 ‘Franklin Shepard, Inc’는 의성어의 리듬이 코믹하게 사용된 재치있는 곡이다. 또한, 단순한 선율로 아련하게 펼쳐지는 ‘Not a Day Goes By’는 <소야곡>에 나오는 명곡 ‘Send in the Clowns’를 연상시키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명곡이다.
중견 배우들의 활약과, 배우 출신 연출의 갈등과 화해에 초점을 맞춘 디테일로, 이번 초콜릿 팩토리의 <메릴리 위 롤 어롱>은 영국 평단의 호평 속에 오는 3월까지 공연할 예정이다. 손드하임의 연극성이 강한 독특한 음악 스타일과, 알수록 흥미로운 스토리, 그리고 이번 프로덕션을 빛내는 중견 배우들의 훌륭한 앙상블로 다시 한번 웨스트엔드 진출을 꿈꾸어도 좋은 작품인 듯하다. 그리고 나아가 브로드웨이까지 그 성공이 이어져, 20년 전 초연 실패의 오명을 씻을 수 있는 작품으로 재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3호 2013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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