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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NEW YORK] 찰리 채플린에 대한 현재진행형 사랑 <채플린> [No.109]

글 |정예경(뉴욕 통신원) 사진제공 |Boneau/Bryan-Brown,INC 2012-10-22 3,846

무성영화 시대의 정점을 찍으며, 배우이자 감독, 제작자 1인 3역을 수행하며 전설로 남은 찰리 채플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그의 인생을 다룬 뮤지컬 <채플린>이 개막했다. 배우였던 어머니는 정신분열증에 걸려 병원으로 가고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는 점, 그 모든 환경적 장애를 극복하고 아메리칸 드림의 실례가 되었다는 점, 세간의 시기와 질투, 모함에서 비롯된 인생 역경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를 남김으로써 한 세기가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까지, 그의 인생은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극적 요소를 갖춘 좋은 소재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중들의 사랑은 현재형이란 것을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을 보고 날 실감할 수 있었다.

 

 

 

훌륭한 장면들
무성영화 시대의 영화 상영장으로 돌아간 듯, 스크린이 내려오며 음악과 함께 채플린이 생전 만들었던 영화가 상영된다. 오케스트라 음악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스크린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스크린 뒤에서 대기하던 배우가 방금 전 장면과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2D가 실사 3D로 전환되는 순간, 배우는 아이코닉한 채플린의 포즈를 음악과 함께 절묘하게 매치시켜 보여주면서, 대사 없이도 ‘내가 채플린이다’를 강렬히 선포한다. 영화에서 무대극으로 전환되면서, 스크린 속 인물이 살아날 때의 쾌감! 무성영화에 원래 내재된 성질을 십분 활용하여 무대에 차용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오프닝 장면이다.


공연은 찰리 채플린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작된다. 여배우였던 엄마 한나는 찰리와 거리를 걸어가며 행인들의 특징을 잡아 캐릭터를 설명해준다. 장면이 전환되면서 자연스럽게 어른이 된 찰리는 역시 배우가 되었는데, 할리우드 감독의 눈에 들어 혈혈단신 미국에 가게 된다.

할리우드의 키스톤 스튜디오. 감독은 캐릭터를 연구하기 위해 대본을 달라는 찰리를 비웃으며, 대본 같은 건 없으며,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한다. 영화 스튜디오 경험이 처음인 찰리는 당황하여 촬영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리고, 내일까지 자기를 웃길 수 있는 아이템을 만들어오지 않으면 당장 해고라는 감독의 말에 의기소침해진다. 좌절하던 찰리는 과거를 회상하고, 장면은 그의 어린 시절 겨울로 플래시백 된다. 오프닝 신과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지만, 어른이 된 찰리는 그 장면을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고 있다. 찰리는 캐릭터에 관해 이야기 해주던 엄마의 말을 따라, 각 행인들의 특징이 되는 지팡이, 재킷 같은 소품을 뺏어 걸치고 그들을 모방해본다. 마지막으로 모자를 뺏어 쓰는 순간, 라이트가 바뀌며 현실 공간으로 순식간에 전환! 홀로 라이트를 받으며 잠시 동안 정적 속에 서있는 그는, 다름 아닌 트램프(영화 <키드>에서 찰리 채플린이 연기한 캐릭터)이다. 너무나도 능수능란하고 소름 돋는 장면 전환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탄성이 터져 나온다. 트램프의 탄생 과정을 빠르고 설득력 있게 보여준 것이다. 관객들이 트램프로 변신하는 과정을 분명 보고 있는데도, 그 사실을 일찍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전개시켰기 때문에, 잠깐 마술쇼를 본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 작가와 연출은 결코 상황 설명에 시간을 낭비하는 법이 없다.

 


찰리는 형 시드니를 할리우드로 불러서 매니저로 고용하며, “인생은 영화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후 그는 감독이자 제작자로 변신하여, 어린 시절 엄마와 헤어져야만 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풀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배우들에게 단순히 운다는 설정이나 우는 시늉 대신, 가슴으로 캐릭터를 느끼고 아픔의 감정을 실제로 재현해내어 연기하라고 요구한다.

완벽한 것만 같았던 삶. 하지만 찰리는 믿었던 약혼녀 밀드레드에게 배신당한다. 그녀의 임신은 거짓이었으며, 이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그녀는 그냥 물러날 수 없으니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채플린은 분노가 치미는 시점에, 행복하고 재미있는 캐릭터를 연기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이 광대의 숙명 아니던가. 이 장면은 참으로 압권이다. 배우가 얼마나 다면적으로 채플린이란 캐릭터에 접근해야 했으며,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을 어떻게 하면 한꺼번에 전달해낼 수 있을지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는지가 느껴졌다. 그는 밝게 웃으며 “행복한 인생!” 라는 단어를 외치며 영화 엔딩 신을 완성하는데, 그 행복한 인생이란 단어를 외치는 배우의 뉘앙스에 담긴 두 가지의 복잡다단한 감정이 여실히 전달되었다. 정말 훌륭한 연기였다. 남을 웃기는 ‘꾼’의 인생이 한편으로 얼마큼 성스러운 것인지 생각해보게 될 만큼.

찰리는 최고의 성공을 거둔다. 그 시점 그는 헤나 하퍼라는 할리우드 통신원의 인터뷰를 시답지 않다고 생각해 거절한다. 그녀는 앙심을 품고 채플린을 매장시킬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실행에 옮긴다. 각종 루머와 가십거리를 모으고 채플린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간다. 그녀는 극을 위해 창조된 가상의 인물이지만, 남의 뒤를 캐고 루머를 양산하는 싸구려 삼류 언론, 그것을 그대로 믿고 싶어 하는 우매하고 무서운 포퓰리즘을 상징하는 캐릭터이다.  채플린이 각종 오명을 억울하게 뒤집어썼다는 암시는 헤나 하퍼가 그의 뒤를 캐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이 쉽사리 찰리를 험담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찰리는 쓸데없는 루머에 대응하는 것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고 공식적으로 반론하지 않고, 대중들은 진실 대신 루머를 쉽게 믿어버린다. 곤경에 처한 찰리는 형 시드니에게도 심한 말로 해고해 버리는 등 고집스럽게 외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런 와중 찰리는 우나라는 순수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함께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영화인으로서는 참패를 맛보고, 미국에서도 쫓겨난다.

 


최고의 성공을 맛보다가 졸지에 변명 한번 못하고 억울하게 타지로 쫓기듯 가야만 했던 찰리는 수십 년이 지난 후, 아카데미 시상식에 특별상 수상자의 자격으로 초청된다. 노인이 된 찰리는 우나의 손을 잡고 시상식장으로 조용히 걸어 나온다. 그리고 “인생은 영화가 아니었어. 그들이 나를 아직도 미워할까?” 라고 묻는다. 우나는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한 적이 없고, 그들은 당신을 아직도 기억하고 사랑한다” 라며 찰리를 시상식 무대로 보낸다. 그렇다. 그는 박제가 되어버린 과거의 무성영화 스타가 아니다. 수많은 능력 있는 현대의 크리에이터들은 그를 스크린에서 데리고 나와 그만의 색깔과 목소리를 복원해내어 브로드웨이 무대에 세웠다.

찰리를 평생 도왔던 사람들이 그의 환상 속에 하나씩 등장하며 엔딩이 시작된다. 시드니, 엄마, 한때 사랑했던 여인들, 감독, 동료들… 음악이 절정에 달하면 스크린이 내려오는데, 찰리는 뭔가를 결심한 듯 스크린을 향해 뒤돌아 힘차게 걷는다. 그리고 스크린 안으로 사라진다. 동시에 스크린에는 낙천적인 트램프가 여유롭게 여행을 떠나는 뒷모습이 비춰지며, ‘The End’라는 글자가 나타난다. 너무나 아름답고도 깔끔한 엔딩, 오프닝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세련된 형식미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일제히 기립했다.


 

타임 슬립의 장면 전환
보통 무대극은 영화와는 달리 길어야 3일 안에 일어나는 일들을 자세히 풀어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한 가지 중심 사건을 응집력 있게 풀어나가기 위해서다. 에픽 장르나 너무 긴 시간을 아우르는 일대기적 이야기는 뮤지컬 소재로 적당하지 않다. 이런 소재는 자칫하면 긴 시간 동안의 일이 설명적으로 산만하게 풀어놓아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단순 병렬구조는 최악의 플롯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채플린>의 제작팀은 ‘한 인물의 인생을 어떻게 지루하지 않고, 감동까지 선사하며 보여줄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춰 고민을 한 티가 났다. <채플린>은 <헤어스프레이>, <애니>, <프로듀서스>의 대본을 썼던 토마스 미한, 음악, 가사, 대본까지 담당한 크리스토퍼 커티스의 합작품으로, 찰리 채플린의 일생을 2시간 30분 안에 축약해서 보여준다.
그가 인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어린 시절의 특정 장면을 회상하고, 그 회상 신은 현재의 상황과 절묘하게 연결돼 변주되며 현재의 채플린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회상 신에서 절묘하게 현재로 돌아오며 타임 슬립을 하는 기법을 사용해, 일생을 시간 순서대로 보여주는 고리타분한 방법에서 벗어나, 플롯의 입체성과 통일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온몸이 짜릿할 만큼 유려한 타임 슬립의 장면 전환들은 작가, 작곡가, 연출의 훌륭한 합작품이었다.

 


 

경력자의 노련함과 절제미가 주는 수준 높은 감동
아무리 천재적이라도 초심자들이 모였다면 이런 성질의 작품은 절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컨셉과 목표를 향해가는 일관성을 유지했고, 많은 경험에서 얻어진 무대 어법의 테크닉으로 촘촘히 바느질 되어 있었다. 작품이 추구하는 방향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과감히 잘라내고, 한정된 재료를 최대한 잘 이용하자고 했다. 이런 과감한 결단은 경험자의 여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창작자들은 작업 중 자신의 색깔을 작품에 반영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이 작품의 크리에이터들은 예술가로서의 자기를 드러내기를 꾹 참아내고, <채플린>이란 작품 그 자체를 파고들었다. ‘나의 작품’이 아닌, ‘우리의 작품’을 만들겠다는 합의와 좋은 팀워크가 빛났다.

이 작품은 ‘무채색, 흑백영화’의 분위기와 컨셉을, 음악, 무대미술, 연출 등 모든 분야에서 일관되게 전달한다. 특히 무대미술은 비주얼적으로 현재건 과거건 모두 그레이 톤으로 통일했다. 밝고 어둡고의 차이는 있지만, 결코 블록버스터들이 가진 강렬한 색깔의 대단한 세트들은 없었다. 마지막 신 아카데미 시상식장의 레드 카펫을 상징하는 붉은 커튼은, 흑백시대에서 컬러시대로 넘어오며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암시했다. 단 한 번 쓰인 강렬한 레드톤 덕에 강렬한 이미지의 엔딩이 연출됐다.


음악 역시 철저히 무채색 코드로 디자인 되었다. 작곡가는 음악을 더 다채롭게 만들기 위해  9, 11, 13화음을 쓰지 않았다. 장장 2시간 반 동안 얼마나 화려한 화음을 쓰고 싶었을까? 하지만 그런 종류의 화성 진행을 쓰는 순간, 이 극은 자칫하면 총천연색의 일반적인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되어버리고 만다. 다소 건조하게 들릴지라도 전체적인 스타일을 위해 양보할 줄 알았던 작곡가. 하지만 그러면서도 흑백 영화 시대의 컴필레이션 음악 스타일은 전혀 쓰지 않았기 때문에, 매너리즘이나 클리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이것이 정말 대단한 점이라 생각된다. 정답처럼 생각되는 빤한 것을 쓰지 않고, 그렇다고 음악가로서의 자기 어법을 완전히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극에 어울리는 접점의 음악 스타일을 찾아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음악감독, 연출 역시, 채플린 역을 맡은 배우에게 노래를 ‘잘’하지 말고, ‘채플린이 되라’고 요구한 듯했다. 그는 아름답게 노래하지 않고 채플린으로서 노래했다. 창작자, 배우 모두 개개인이 욕심을 덜 부렸기 때문에 전체가 더욱 아름다워지고 작품 수준이 향상되었다.


채플린이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초대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스마일을 합창하며 그를 반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창작 팀은 그 감동적인 일화마저도 삭제하고, 자신들만의 엔딩을 만들었다. 이유는 마지막에 그 노래를 쓰는 순간, 극이 컬러를 입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대단한 판단이다. 사실 그 노래는 원곡이 너무나 ‘스위트’ 해서 마지막에 이것을 부른다면, 브로드웨이적인 엔딩을 만들어질지언정, 애써 쌓아왔던 절제된 에너지와 통일성은 한순간 무너질 것이 분명하다. 고급스럽게 만든 아트 워크에 얕은 수를 써서 클리쉐를 도입하는 순간, 관객들은 간파당했다는 생각에 찝찝하고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팀 스스로가 자신들의 결정과 방향에 자부심을 가졌던 덕에 우리는 깔끔한 엔딩을 볼 수 있었다. 
절제는 하고 싶은 말은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한다. 역시 노련한 창작자들은 남다른 기술력과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동시에, 필요할 때는 확 줄일 줄도 아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한정된 재료로 훌륭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모든 아이디어를 발산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채플린>은 노련미와 절제미가 융화된, 대중적이지만 결코 전형적이지 않은 훌륭한 뮤지컬 작품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9호 2012년 10월 게재기사입니다.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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