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일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지난 3월 11일 발생한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빼놓을 수 없다. 일본열도를 강타한 규모 9.0의 대지진과 최고 높이 40.5m의 쓰나미, 체르노빌 사고에 맞먹는 후쿠시마 제1원전 1~4호기 폭발로 인한 방사능 누출은 문화예술계에도 엄청난 타격을 가했다.
지진이 발생한 직후 직접적인 쓰나미 피해를 입은 동북 지방은 물론이고 도쿄 등 수도권에서도 정전과 교통수단 마비 등으로 공연, 전시, 영화 등 문화예술 행사가 2~3일간 전면 취소됐다. 전력 부족으로 한 달 동안 제한 송전이 실시되자 도쿄의 국립극장과 신국립극장 등 국립 공연장 5개는 3월 공연을 전부 취소했다.
동북 지방의 경우 공연장 상당수가 피해를 입어 몇 달간 휴관한 곳도 있지만 도쿄 등 수도권의 민간 공연장은 1주일 안에 공연을 재개했다. 극단 시키(四季)의 경우 3월 13일부터는 평소대로 공연을 올렸으며 제국극장과 닛세이(日生) 극장 등 대표적 민간 극장들도 뒤를 이었다. 단발적으로 공연되는 클래식이나 발레가 대부분 취소된 것과 달리 장기 공연하는 연극과 뮤지컬은 공연이 재개됐다. 그렇지만 2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하고 직접 피해액만 300조 원(방사능 누출로 인한 간접피해액 제외)이 넘는 상황에서 일본 열도 전체가 한동안 외출을 삼가고 자숙하는 분위기였다. 또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장기화에 따른 방사능 공포는 상당 기간 극장으로 향하는 관객들의 발을 붙잡았다.
일본 공연계에 미친 대지진의 영향이 얼마나 되는지 자료가 없지만 참고할 만한 수치들이 몇 개 있다. 시키와 함께 뮤지컬계의 양대 산맥인 토호의 전반기(3~8월) 결산을 보면 3월 대지진의 영향으로 제국 극장에서 28회, 크리에 극장에서 5회 공연이 취소됐다. 하지만 뮤지컬 <레 미제라블> 등 올해 라인업 작품들이 예상보다 선전하면서 적자 폭이 줄었다. 당초 토호는 전년 동기 대비 30% 이상 수익이 감소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14.6%인 3억 3,000만 엔에 그쳐 안도했다. 매출은 8.5% 감소한 57억 1,900만 엔이었다.
또 여성들만 나오는 일본 특유의 뮤지컬인 다카라즈카의 경우 모기업인 한큐한신(阪急阪神)홀딩스의 전반기 결산을 보면 엔터테인먼트와 스포츠 부문을 합한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4% 감소한 542억 3,100만 엔이었지만 수익은 15.5%나 감소한 89억 4,000만 엔에 그쳤다. 토호에 비해 유난히 금액이 큰 것은 인기 야구단 한신 타이거스의 매출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카라즈카만 따로 분리해 발표되지 않았지만 공연 횟수 등이 전년 동기 대비 많이 줄었다고 실적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토호와 다카라즈카의 사례를 봤을 때 올해 일본 뮤지컬계는 지난해에 비해 적어도 수익이 15% 정도 감소한 것으로 짐작된다. 상장회사가 아니라 실적을 공개하지 않는 극단 시키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해 일본 뮤지컬계를 되돌아보면 토호가 홈그라운드인 제국극장 설립 100주년을 맞아 화제작을 전진 배치한 것이 눈에 띈다. 일본 최초의 서양식 공연장인 제국극장은 뮤지컬 전문 공연장으로 사용되는데, 올해 라인업을 보면 토호와 평소 친밀한 관계인 일본 최대 연예기획사 자니즈의 공동 제작 작품이 세 편이나 된다.
3월에는 타키 앤 츠바사의 타키자와 히데아키(龍澤秀明)의 <신춘 타키자와 혁명>과 킨키 키즈의 도모토 코이치(堂本光一)의 <쇼크>가 포진했고, 9월에는 캇툰의 카메나시 카즈야의 <드림 보이스>가 무대에 올랐다. 스타 마케팅의 정점을 보여주는 이들 작품은 뮤지컬 형식의 쇼에 가깝다. 팬들의 열광적인 지지 덕분에 <신춘 타키자와 혁명>은 올해 5년째, <쇼크>는 12년째 그리고 <드림 보이스>는 8년째 공연되고 있다.
토호 자체 뮤지컬로는 <레 미제라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삼총사>, <뉴욕에 가고 싶다>, <댄스 오브 뱀파이어> 등이 주목된다. 특히 <레 미제라블>은 올해 토호의 적자를 상당 부분 메워준 일등공신이다. 지난해 영국에서 25주년을 기념해 만든 새로운 버전이 처음 일본에서 공연되는 것이어서 관객 몰이를 했다. 토호는 새 버전과 함께 그동안 이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나오는 특별 콘서트도 개최했다. <레 미제라블> 외의 작품들도 모두 일본 초연인 데다 인기 있는 뮤지컬 배우들의 캐스팅으로 주목을 받았다.
일본 전역에 전용극장 10개를 운영해온 시키는 지난해 후쿠오카에서 철수한 대신 올해 3월 홋카이도 삿포로에 새로 극장을 마련했다. 극장 오픈 직전 대지진이 발생해 개장을 연기할 가능성도 제기됐으나 아사리 게이타(淺利慶太) 대표는 예정대로 추진했다.
신작 퍼레이드였던 토호와 달리 시키는 올해도 <맘마미아>, <위키드>, <에비타>, <오페라의 유령>, <라이온 킹>, <캣츠>, <미녀와 야수>, <사운드 오브 뮤직>, <코러스 라인> 등 기존의 레퍼토리를 계속 공연했다. 또 <벌거벗은 임금님>, <유타와 신기한 친구들>, <꿈에서 깨어난 꿈> 등 대표적인 어린이 뮤지컬들의 전국 순회공연을 계속했다.
굳이 시키의 신작을 꼽으라면 갈라쇼 <송 앤 댄스>가 눈에 띈다. 시키에서 같은 타이틀로 만든 다섯 번째 <송 앤 댄스>로 올해 <스피릿(영혼)>이란 부제가 붙었다. 대지진과 원전 사고로 지친 국민을 위로하는 한편 시키의 여러 창작뮤지컬에서 음악을 맡았던 작곡가 고(故) 미키 다카시(1945~2009)에 대한 추모를 담고 있다. 일반적인 갈라쇼가 2~3일 공연되는 데 비해 시키의 <송 앤 댄스>는 몇 달씩 공연되며 전국 투어까지 한다.
한편 다카라즈카는 대지진의 영향도 있었지만 관객 동원의 핵심인 인기 있는 오토코야쿠(남자역 톱)들이 잇따라 퇴단하면서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나 준, 아란 케이, 야마토 유가, 미즈 나츠키, 아야부키 마오 등 오랫동안 오토코야쿠로 군림했던 배우들이 지난 2009년과 2010년 약속이나 한 듯 다카라즈카를 떠나 일반 뮤지컬과 연극 무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그 뒤를 이은 배우들이 선배들에 비해 중량감이나 카리스마가 떨어지면서 다카라즈카는 관객 격감에 고심하고 있다.
끝으로 최근 일본에서 창작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현상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여러 창작뮤지컬이 만들어졌으나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잊혀졌다. 하지만 올해 오사카 우메다 극장이 제작한 <미츠코>, 극단 와라비좌의 <추억은 방울방울>, 엑스저팬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히데(HIDE)의 곡으로 만든 <핑크 스파이더> 등이 호평을 받으며 인구에 회자됐다.
<미츠코>는 일본인으로 처음 국제결혼을 해 유럽 통합의 대부인 리하르트 니콜라스 에이치로 폰 쿠덴호프-칼레르기 백작을 낳은 아오야마 미츠코의 드라마틱한 삶을 그린 작품이다. <지킬 앤 하이드>의 프랭크 와일드혼이 음악을 맡았는데, 2005년 일본-EU 교류를 기념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콘서트 버전으로 처음 공연된 이후 6년 만에 전막으로 제작됐다.
일본에서 창작뮤지컬을 가장 많이 만드는 와라비좌는 올해 지브리 스튜디오의 대표 애니메이션 가운데 하나인 <추억은 방울방울>을 무대화했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자신의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무대화를 허락한 데다 원작의 서정성을 잘 살려 큰 화제를 모았다.
또 <핑크 스파이더>는 1998년 34살로 자살한 엑스저팬의 기타리스트 히데의 곡으로 만든 작품으로 제작 전부터 화제가 됐다. 히데는 생전에 분홍빛 머리카락 등 독특한 비주얼뿐만 아니라 뛰어난 작곡 실력으로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 다만 이 작품은 초현실적인 내용을 담았기 때문에 드라마보다 음악을 즐기기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9호 2011년 12월 게재기사입니다.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