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런던 극장가는 어려운 국가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런던 극장 협회, 솔트(SOLT)에 따르면 지난 2009년 7월 18일을 기준으로 해서 6개월간의 통계를 내보니 총 7,267,426명의 관객이 52개의 주요 런던 극장을 찾았다. 이것은 같은 기간 작년에 비해 2.5퍼센트가 증가한 것으로 박스 오피스 판매수치 또한 무려 3.5퍼센트나 성장했다. 솔트 운영위원장인 니카 번즈(Nika Burns)는 ‘올 초에 공연계를 전망할 때, 관객 수가 작년보다 10퍼센트 정도만 떨어지면 만족스러울 것 같다’고 예측했었는데, 기록적인 관객 수치 상승률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라며 쾌재를 불렀다.
장르별로는 여전히 뮤지컬이 전체 극장시장의 점유율 61퍼센트로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일반 연극을 보는 관객들도 작년에 비해 19퍼센트나 증가해 연극계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분위기다.
이렇듯 다른 산업에 비해 공연계가 경기 불황 속에서 호황을 누린 까닭은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는 대신 재미난 공연과 텔레비전을 보면서 여가를 즐기는 일이 늘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여름과 가을 사이만 문을 여는 야외극장(Outdoor Theatre)들도 덩달아 신이 났다. 시원한 야외에서 갓 구운 바비큐와 향긋한 와인을 마시면서 즐기는 관극은 상상만으로도 흐뭇하다. 뮤지컬 <헬로우 돌리>가 공연되고 있는 오픈에어 극장(Open Air theatre)도 일상 탈출을 꿈꾸는 뮤지컬 팬들로 매일 문정성시를 이루고 있다.
1932년 처음 문을 연 오픈 에어 극장은 리젠트 파크 안에 위치하고 있다. 1240석 규모의 이 대형 야외극장은 매년 13주, 여름부터 가을까지만 공연을 한다. 공연 장르는 셰익스피어의 정통 연극부터 뮤지컬까지 다양한데 2008년 예술 감독이 티모시 쉬더(Timothy Sheader)로 교체되면서 공연 장르의 다양성과 질적 향상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오픈 에어 극장은 주변이 모두 울창한 나무와 잔디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특징이며, 전통적인 원형극장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객석 밖의 무대 옆 잔디밭에도 자유롭게 앉을 수 있어서 잔디 위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공연을 보는 관객들도 있을 정도다.
제리 허먼(Jerry Herman)의 1964년 작. 뮤지컬 <헬로우 돌리>은 7월 30일부터 이 오픈 에어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헬로우 돌리>의 무대는 3층으로 된 심플한 목재의 원형 돔 모양으로, 각 층마다 계단이 있다. 2층에는 오케스트라가 자리 잡고 있는데 숲 속에서 듣는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감동 그 자체다. 오케스트라 옆에는 배우들이 무대 뒤로 들어가는 통로가 연결돼 있다. 재미난 점은 초록빛 나무들이 이 통로의 커튼 역할을 대신 한다는 것. 오프닝 음악이 시작되자 삽시간에 배우들이 객석 쪽으로 들어와 노래를 하며 소란스럽게 무대 위로 올라간다.
디자이너 피터 메킨토시의 (Peter McKintosh) 의상은 20세기 미국의 패션을 고운 색과 세련된 디자인으로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돌리는 자신의 비즈니스 카드를 관객들에게 나눠주며 뚜쟁이로서의 투철한 직업정신을 보여주는데 이런 친근감 있고 코믹한 오프닝은 공연에 대한 호감도와 기대치를 높여준다. 바로 이 순간! 평범한 돔형이었던 무대는 어느새 기차역 티켓 부스로 변신하는가 싶더니 이내 벤디겔러 씨(Vandergelder)의 가게로 변신한다. 심플했던 무대의 변신은 로버트 태권브의 삼단 합체 변신만큼이나 박진감 넘치고 흥미진진하다. 오픈 에어 극장에서 본 지금까지 모든 공연들 중에서 이렇게 무대가 재치 있고 속도감 있게, 그러면서도 미적으로 예쁘게 변신하는 건 처음이다.
뮤지컬 <헬로우 돌리>는 제리 허먼 작사 작곡, 마이클 스튜어트의 극작으로 만들어졌는데토른톤 와일더(Thornton Wilder)의 1938년 소설 <더 매치메이커(The Matchmaker)>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처음 스케이지 뮤지컬로 올라간 1964년에는 여주인공 캐롤 차닝(Carol channing)이 돌리 역을 맡았고 그해 <헬로우 돌리>는 토니상 10개 부문을 수상하면서 역대 최고의 수상 기록을 세웠다(이 기록은 2001년 <프로듀서스>가 12개 부문을 수상하면서 깨진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캐롤 캐닝의 돌리보다는 1969년 진 켈리 감독이 연출한 영화 버전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의 돌리가 더 기억에 선명하다. 스트라이샌드는 당시 26세로서 돌리 역을 맡기엔 아주 어렸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감미롭고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 때문인지 캐롤 캐닝의 노래에서 느껴지는 연륜은 부족했다. 스트라이샌드의 노래가 상큼한 겉절이 김치 맛이라면 캐닝의 목소리는 숙성된 김치 맛이랄까.
이번에 돌리 역할을 맡은 배우, 사만파 스피로(Samantha Spiro)는 연극 출연 경험은 풍부하지만 뮤지컬 경험은 많지 않다. 그녀의 농익은 코믹연기는 훌륭했지만 노래는 안타깝게도 스트라이샌드의 달콤함과 캐닝의 숙성되고 깊은 맛 그 어느 것에도 미치지 못했다. 무엇보다 스피로는 돌리 역할을 하기에는 강한 카리스마가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다른 모든 배우들, 특히 반더겔러 역할을 맡은 알란 코르두너(Allan Corduner)와 앙상블들은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난 연기와 노래, 춤 실력을 보여주었기에 객석의 열기는 뜨거웠다. 공연 중간에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는 관객들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무대와 객석이 완전한 하나가 될 때 나는 너를 ‘우리’라 부른다.
때는 1890년. 욘커스에 사는 구두쇠 비료사업가 반더겔러 씨는 빈털터리 예술가 엠브로스와 사랑에 빠진 조카 에멘가드를 구제(?)하고자 뉴욕 최고의 뚜쟁이, 돌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밝고 명랑한 성격의 돌리는 주변 사람들의 고민은 늘 해결해주지만 정작 자신은 남편의 사별 후 외롭게 살고 있다. 돌리는 자신의 의뢰인 반더겔러를 보고 불현 듯 그와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의도적으로 반더겔러에게 접근한다. 한편 반더겔러 가게의 점원인 헤클과 타커는 결혼과 새로운 꿈을 찾아 뉴욕으로 떠나고 싶어 하고, 이를 지켜본 돌리는 일부러 반더겔리와 결혼하기로 되어있는 모자가게 주인 몰로이에게 두 청년을 보낸다. 얽히고설키는 오해와 반전 속에서 결국 사랑에 빠진 반더겔러의 조카 에멘가드와 엠브로스, 몰로이와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헤클, 그리고 반더겔러와 몰리는 모두 행복한 사랑을 맺는다.
<헬로우 돌리>는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야외극장에서 하는 공연들은 극장이 가진 매력적인 분위기 때문에 공연의 수준이 어느 정도 이상만 되어도 으레 ‘야외극장에서 하는 공연이니까 저 정도면 괜찮다’는 식의 관용이 베풀어지길 기대해왔다. 그러나 <헬로우 돌리>는 ‘야외극장 공연이기 때문에만 저 정도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들게 할 만큼 극장의 위치, 구조의 특수성을 최대한 고려한 흔적이 엿보인다.
먼저 연출가 티모시 쉬더는 야외무대를 산만함 대신 친밀하게 만들기 위해 배우들이 관객석과의 경계, 즉 ‘제 4의 벽’을 완전히 무너트리지 않는 선에서 좀 더 관객에게 친밀하게 다가설 수 있게 했다. 관객이 극 속에 합류될 수 있도록 유도하려는 시도 또한 이런 친밀감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헬로우 돌리>의 관객 친화적인 연출 기법은 타인, 바로 우리의 가렵고 아픈 부분을 찾아서 상처를 치유해주려는 주인공 돌리의 캐릭터와도 일치한다. 그러나 무대와 객석이라는 가시적인 거리보다 무대 위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라는 두 개의 다른 감성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는 점이 더욱 더 따뜻하고 정겹다.
제리 허먼 특유의 쉽고 감성적인 음악과 따뜻한 스토리와 함께 <헬로우 돌리>의 가장 큰 재미 포인트는 뭐니 뭐니 해도 코믹한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부각시키는 재미난 대사와 크고 작은 상황들 속에서 나오는 도다바다와 슬랩스틱 코미디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뮤지컬 <메리 포핀스>로 로렌스 올리비에 최우수 안무상과 토니상 최우수 안무상을 휩쓴 안무가 스티븐 메어(Stephen Mear)는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유쾌한 안무로 웃음의 작은 디테일까지도 놓치지 않고 살려냈다. 특히 하클(Hackl)과 터커(Tucker)가 뉴욕으로 사랑과 꿈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하고 돌리와 함께 `Put on your Sunday Clothes`를 부르면서 뉴욕으로 가는 기차를 표현하는 장면과 하클과 타커가 반더겔러를 피해 모자가게에서 돌리와 몰로이 여사의 도움으로 모자들 사이와 거울 뒤를 마치 춤을 추듯, 곡예를 하듯 숨 가쁘게 종횡무진 무대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장면, 그리고 레스토랑에서 진짜보다 더 리얼한 각종 식재료가 든 접시를 들고 화려한 춤을 선보이는 앙상블, 웨이터들이 춤추는 장면 등은 재치 있고 흥미 넘친다. 이렇듯 <헬로우 돌리>는 연출만큼이나 엄청난 상상력을 요구하는 일이 바로 이 안무가의 역할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내 인생에 디바는 당신 뿐. 제리 허먼과 디바 뮤지컬(The Diva musical)
브로드웨이의 대표 게이 작사, 작곡가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뮤지컬 창작자 중 하나인 허먼은 뮤지컬 <밀크 앤 허니(Milk and Honey)>(1961), <헬로우 돌리(Hello Dolly!>(1964년)를 비롯하여 <메임(Mame)>(1983), <새장 속의 광인들>(1983)등을 만들었다. 그의 음악은 대부분 처음 들으면 아주 쉽고 편안하면서 금세 귀에 각인된다. 동시에 감정 저 밑바닥까지 속속들이 적셔 내려가는 가사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허먼의 작품들은 토니상에 다섯 번이나 작품상 후보에 올랐으며 이중 <새장 속의 광인들>과 <헬로우 돌리>가 영광의 작품상을 획득했다. 또한 명배우, 더글라스 호지(Douglas Hodge)가 열연하기도 했던 2008년 리바이벌 버전 <새장 속의 광인들>은 런던 평론가들이 뽑은 최고의 뮤지컬상과 올리비에 베스트 리바이벌 뮤지컬 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드디어 2009년 허먼은 토니상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뮤지컬 코미디의 전성기가 가고 바야흐로 로큰롤 뮤지컬이 유행처럼 퍼지던 1960년대 브로드웨이에서 허먼은 <헬로우 돌리>를 통해 톡톡 튀는 한명의 여주인공을 탄생시키는 디바 뮤지컬 형식을 선보였다. 디바 뮤지컬이란 1막 첫 곡에서 주인공의 캐릭터를 강한 오프닝 넘버에 보여준 뒤 다른 주변 인물들 간에 벌어지는 갈등이나 사건으로 주인공의 성격을 구체화 시키고, 2막 하이라이트인 ‘11번 곡’에서 주인공을 영웅처럼 부각시키는 형식을 일컫는다.
<헬로우 돌리>는 연상되듯 주인공 돌리를 위한, 돌리에 의한 뮤지컬이다. 허먼의 디바는 <메이>의 주인공 메이, <새장 속의 광인들>의 자자까지 많은 뮤지컬 작품 속에서 등장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 디바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행복을 만들어가는 방법, 그 중에서도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을 깨닫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한 가지 게이인 허먼이 남자가 아닌 여성을 이렇게 주인공으로 만든 것이 흥미로운데 이것은 <헬로우 돌리>가 만들어질 당시가 게이 소재가 극 속에서 공식적으로 허용되던 70년대 이전인데다가 허먼 자신도 게이로 커밍아웃하기 이전의 혼란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이었으리라. 그가 만들어내는 디바들은 성별과 직업 나이와 관계없이 모두가 닮은꼴이다. 그들은 모두 다른 인물이지만 실은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며 행복하고 훈훈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허먼,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웨스트엔드 공연계가 선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평론가들은 제작자들이 도전과 실험정신이 결여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일침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타인의 이야기에 쉽게 마음의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삭막한 이 순간 누군가에게 행복과 희망의 이야기와 노래를 한 편의 공연 속에 담아내려는 것만큼 용감한 도전이 또 있을까?
`저기 저 퍼레이드가 내 앞을 지나가기 전에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고 당신이 가진 문제들을 떨쳐버리세요. 왜냐하면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순간은 바로 여기, 오늘이거든요. 지금의 나 그대로의 나처럼” 허먼의 토니상 공로상 수상 소감처럼 저 퍼레이드가 내 곁을 지나기 전에 행복의 메신저가 되어줄 그녀를 불러본다. "헬로우 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