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촌(耆村) 여석기 선생은 1922년 경북 김천에서 천석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동경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1946년 불과 스물넷의 나이에 강단에 서게 된다. 평생을 영문학자로 교단에 서오면서 한국영어영문학회와 한국셰익스피어학회의 창립과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 선생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국 연극 발전에 대한 공로다. 1960년대 동랑 유치진 선생이 만든 드라마센터의 연극아카데미 원장을 맡았고, 이곳에서 ‘극작 워크숍’을 운영했다. 이곳을 거친 박조열, 윤대성, 오태석, 노경식, 이강백 등은 당대 연극계를 이끌었고 지금까지도 한국 연극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했다. 1970년대에는 연극 비평의 토대를 마련한 계간지 『연극평론』을 발간했다. 선생은 또한 본격적으로 연극 평론을 시작한 한국 연극 평론가 1호다. 최근 90년의 삶을 회고하는 형식의 책 『여석기, 나의 삶, 나의 학문, 나의 연극』을 엮어 냈다. 비망록(備忘錄)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이 책은 선생의 가족사부터, 쌓아온 업적들의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징용에 간 이야기나, 6.25 전쟁 당시의 일화는 개인사이면서 격동하는 한국사의 흐름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선생은 격변하는 한국사의 한복판에 있었고, 비교적 무탈하게 학자로서 중심을 잡으며 한국 영문학과 연극이 지금의 위치에 있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 책의 한 대목인 “사람은 꼭 필요한 시기에 알맞게 나타난다”는 선생의 말씀에 크게 동감한다. 그런 혼란스런 시대에 등장한 분이 선생이어서 한국 문화계로서는 참 다행이고, 특히 연극계로서도 큰 행운이었다. 선생은 인터뷰 내내 인자한 미소로, 아흔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빛나는 지성을 나눠줬다. 여유 있는 말씀과 여전히 유머를 잃지 않는 언변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번 달부터 각계 존경할 만한 학자나 아티스트를 모시는 ‘마에스트로’ 인터뷰 꼭지를 시작한다. 그 첫 주인공으로 여석기 선생을 모실 수 있어서 <더뮤지컬>로서도 큰 영광이다.
기촌 회고록을 준비하며
『여석기, 나의 삶, 나의 학문, 나의 연극』은 선생님의 삶을 세 가지 굵직한 테마로 기억들을 엮은 책입니다. 선생님이 하신 경험들이 남달라 간접 경험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내 호를 따서 ‘기촌(耆村) 회고록’이라고 했는데 출판사에서 북 커버 디자인 상의를 하다가, 제목을 바꾸면 어떻겠냐고 하는 거야. 장윤희 교수가 디자인해주는 사람이라 그런지 감각이 달라. ‘여석기, 나의 삶, 나의 학문, 나의 연극’으로 하자고 해. 듣고 보니 신선한 거야. 처음부터 내용을 딱 구성한 것은 아니었지. 애초부터 자서전은 아니고 회상록을 쓰려던 것인데, 회상은 생각나는 대로 쓸 수밖에 없어. 그래도 간단히 셋으로 갈라놓았으면 좋겠다 했지. 제1부는 해방 때까지로 끝나요. 해방 때는 내가 거의 대학을 끝마쳤을 때야.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대학 선생이 됐다고. 그때는 그럴 수 있었어. 비교적 시대별로 쓰긴 했지만 꼭 그렇게 정확한 구분은 아니에요. 2부는 나의 학문에 관한 챕터지만 연극 이야기가 나오고 뒤섞여 있어요.
선생님은 남다른 경험을 많이 하셨습니다. 살아오신 시기가 혼란의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살아온 90년이라는 것이 파란만장하죠. 나는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별로 파란이 없는 인생을 살았죠. 그게 행복한 건가? 지금껏 무사하게 살아왔는데 우리 주변에 보면 그 시대의 부침 속에서 돌아가신 분들도 많아요. 식민지 지배도 받았고 동족 전쟁도 겪었고, 요 근래에 와서는 산업화다 민주화다, 굉장히 많은 일이 있었다고. 누구나 평생을 살지만 그런 일들이 많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이런 시대가 과거에도 많지 않았다고. 이런 부침이 많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내 숙명이기도 하고, 행운이라는 생각도 들더군.
이번 책을 내시면서 본인의 삶을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총체적으로 돌아보시게 됐는데요. 본인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점이 있으신지요?
새삼스레 그런 게 있을 리가 있겠어요? 이 책을 쓰기 전에는 내 어릴 적의 성장 환경을 그저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글로 쓰고 나니까 굉장히 쓰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내가 알 수 있는 한도에서 기록을 해두었다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나보다 손위의 분들은 세상 다 뜨셨거든. 나머지 분들은 나보다 더 모르겠지. 어릴 때 아버지와 관계된 일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됐어요. 이걸 쓰면서 느낀 보람의 한 가지예요.
한국 최초의 연극 평론가
유민영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평론가로 선생님을 꼽았습니다.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본직은 연극 평론가가 아니고 대학 선생이니까 (평론가로서 정체성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어요. 60년대 한국 연극계와 관계를 가질 때 연극 평론 비슷한 것을 신문에 썼다고. 그때는 신문 정도지 연극 관련 잡지가 있는 게 아니니까 근데 뒤에 보니까 한국의 연극 평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람이 됐던 거지. 누가 타이틀을 준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본격적으로 연극 평론가가 나오는 것은 70년대 중후반이에요.
1970년대 10년간 <연극평론>을 발간하셨습니다. 그때 목차를 지금 봐도 흥미로운 콘텐츠가 많고 짜임새 있는 구성입니다. 이 책은 지금 발행되는 여러 공연 잡지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당시에 이렇게 수준 높은 책을 만드실 수 있었나요?
나도 모르겠어. 보통 잡지라는 것이, 잡지를 만들려면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에요. 1인 잡지도 있지만 그건 예외적이고. 명색이 <연극평론>이라는 잡지를 만들려면 스태프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난 없이 출발했어. 스태프가 없이 20권을 내면서 내가 발행 겸 편집인이었으니까. 실제 편집은 한상철 선생이 했지. 나하고는 잘 통하는 사람이었지. 1년에 네 번까지도 발행하지 않았어. 세 번이 고작인데 명색은 계간이야. 제작은 극작가 노경식 씨가 했어요. 그때 출판사에 편집장으로 있었거든. 전부 그 사람들을 착취한 거지. 그 사람들이 연극을 나보다 더 좋아하니까 기꺼이 응해줬다고.
과거에는 희곡 중심의 비평이 많았다면 근래에는 공연 중심의 비평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공연 중심의 비평이 이전에 비해 인문학적인 면이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그건 시대가 바뀌니까 도리가 없다고 봐요. 요새 연극은 우리가 예전에 보던 연극들하고는 달라요. 요새는 좀 더 퍼포먼스에 가깝다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런 추세예요. 감동을 느끼는 관객도 없잖아. 자기 좋으면 박수 치고 하는 거지. 요샌 우리 문화 자체가 다변화되었어요. 관객의 기호도 많이 달라졌고 전달할 수 있는 미디어의 종류도 많아졌어요. 기존의 연극이 지녔던 문화 권력이 옛날만큼은 강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뮤지컬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관객을 많이 동원하고 거기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다고. 결국은 수요 공급의 원칙이야. 연극은 고급이고 뮤지컬은 저급이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요. 역할이 다른 거지. 지금은 세계적으로 수직화가 아니라 수평화 되어 가는 경향이에요. 고급문화하고 대중문화의 구별이 예전만큼 뚜렷하지도 않고.
대중예술은 관객이 즐기기 위해서 보는 것인데 대중예술에 비평이 필요한가 하는 논의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건 그것대로 비평이 필요하겠지. 실제로 그런 걸 비평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재능도 있고.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에요. 난 다른 분야는 잘 모르지만 클래식 같은 경우도 그래요. 통속화되고 있다고 보는 사람이 있어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일류 아티스트들도 지휘자나 성악가나 연주자가 별로 거부감 없이 예전에는 하위문화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데랑 협연도 하고 손도 잡고 하잖아요. 누가 거기에 대해 뭐라 그런 사람이 있어요?
한편으로는 평론이 관객들과 동떨어진 위치에서 그들만이 현학적인 놀이를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Yes and No. 그 지적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당하고 타당한 지적인데, 또 달리 보면 비평의 기능이라는 것이 어느 시대나 기성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이잖아요. 비평은 어디까지나 앞에 두고 있는 대상에 대해 노(No) 하고 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비평가라는 사람을 인간 말종이라고 생각했다고. 작품을 창작하는 극작가나, 배우나, 연출가나 열 사람 모아놓고 비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비평의 순기능에 대해 인정하는 사람이 내 예상에는 두 사람밖에 없을 거야. 대개는 무용지물이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쓰잘데기 없는 얘기만 하고 있고 또 마땅치 않은 사람은 비평가들의 본성이 ‘노’라고 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한다고.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선생님의 글은 표현이 적확하면서도 쉬워서 상황이 보이는 듯합니다. 글에 대해 고집하는 것이 있으신지요?
그런 거 없고, 글을 쉽게 쓰는 것이 타고난 버릇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이 쉽다고 해. 난 쉽다고 하는 게 제일 고맙지. 지금까지도 글에 대해 이런 생각을 품고 있어. 글은 독자가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자신이 아무리 글을 잘 써도 안 읽어주면 아무 의미 없거든. 필자가 어렵게 써서 독자가 이해도 못하게 쓰는 것은 독자한테는 서비스도 아니고 실례지. 비평가도 문장을 쓸 줄 알아야 해. 아무리 연극을 보는 눈이 있어도 비평을 하려면 글을 써야 하거든. 문장이 유아독존적으로 내가 쓰는 대로 따라 오라, 이건 비평이 아니야. 그러니까 비평의 첫 번째 원리는 글쓰기라는 거고, 두 번째는 독자한테 부담을 주지 않고 글을 써라, 셋째는 그렇다고 내용이 얕고 풀이하는 방식은 취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좋은 비평을 쓴다는 게) 어렵지.
한국 연극의 선두에 서서
연극계 거목이신 동랑 유치진 선생은 드라마센터를 설립하고 그곳에 연극 아카데미를 개설했습니다. 그리고 선생께 원장 자리를 맡기셨습니다.
유치진 선생이 보통 욕심이 많은 분이 아니에요. 연극 아카데미는 두 가지 교육 기관으로 이루어졌어요. 하나는 배우 학교이고, 다른 하나는 학교에 연극과가 없을 때니까, 대학원 정도의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을 모았던 거죠. 그 뒤에 연극학과가 생기고 대학원도 생기고 했는데, 드라마센터의 연극 아카데미가 효시가 됐어요. 드라마센터를 구상할 때 유치진 선생은 우리나라 연극계 대표적인 인물이니까 그걸로 만족해도 됐다고. 그때 나이가 예순이 좀 안 되던 때인데, 1961년에 드라마센터에 새로 극장을 짓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어요. 그런데 그게 쉽겠어, 그 당시 우리 사정상 오래 못한 거지. 내가 연극 아카데미 원장을 했는데 3~4년 하고는 단명으로 그쳤어요. 거기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 극작 워크숍이에요. 극작 워크숍은 연극 아카데미의 교과목에 들어가 있지도 않았어. 내가 시작했지.
너무 앞서 갔기 때문에 지속되지 못한 건가요?
그렇다고 봐야지. 그분이 연극에 대한 비전이 있었어요. 한국 연극계에 그런 비전을 가지고 계신 분은 동랑 유치진 선생 한 분밖에 없다고. 꿈은 가지고 있지. 꿈이라는 것이 원래 실현이 안 되는 것이 꿈의 특징 아니에요. 실현이 안 되지만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이냐 말이야. 유치진 선생에 대한 연극계 평은 전부 같지는 않아요. 그분에게 거부감을 가진 분들도 있는데, 난 연극계에 속해 있지 않았고 죽 교편을 잡았으니까 비교적 공평하다고 생각해요. 여 아무개는 유치진 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내 말이 옳다고.
극작 워크숍을 통해 박조열, 오태석, 이강백 등 많은 작가 분들과 작품들을 배출했습니다. 작품의 상호 토론 방식으로 진행했는데 모델이 있었나요?
다른 데서 아이디어를 얻어 오진 않았어요. 자연 발생적이었다고 봐야지. 10여 년 뒤에 미국에 가보니까 거기는 예산도 있고 인원도 있고 해서 훨씬 더 짜여져 있더라고. 그런데 우리가 초보적인 단계에서 한 방식과 다른 것이 없어서, 속으로 당신네들이나 나나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구나, 생각했어요.
한 인터뷰에서 실제 셰익스피어를 만난다면 그저 악수만 하겠다고 하셨는데 질문을 바꿔서 셰익스피어를 만난다면 무얼 물어보고 싶으세요.
직접 만나면 생각이 안 나겠지. 얼떨떨할 거고, 한참 심사숙고 해봐도 할 이야기 없다고. (굳이 묻고 싶지 않으신 게 아닌가라고 생각했어요.) 아카데믹하고 비평적인 입장에서 묻는다면 별 문제지만, 그걸 한마디로 할 수 없는 게, 작가를 만났다고 해서 뭐 하나를 대답해달라고 하는 게 생각이 나겠어.
후기 구조주의 연극이라는 것이 동양의 전통 연극과 맥을 같이합니다. 선생님은 이미 <연극평론>을 발간하실 때부터 동양 연극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서구화된 지금 세대가 전통 연극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60년대, 70년대 연극 평론 했을 때 그런 경향이 강했다고 봐요. 가면극, 탈춤도 그렇고 판소리에 그때 연극하는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지만 나는 그것들이 재미있는 장르라고 생각을 했어요. 우리 전통 연극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문화재밖에 안 돼요. 그건 그것대로 문화재 보존 형식으로 필요하고, 실제 현대 연극 속에 살리려면 현대적으로 재수용해야 해요. 그때 그런 이야기를 그래도 이론적인 배경을 가지고 역설한 사람 중에 하나가 나예요. 전통 연극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진 않았지만 물꼬를 터 놓은 역할을 했달까.
선생님이 해오신 작업들, 극작 워크숍이나 <연극평론>은 시대를 앞서 가는 일들이었습니다. 선생님께 ‘시대를 앞서 가는 지성’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데요. 어떻게 늘 앞서 가실 수 있었나요?
내 취향이라고 얘기해 둡시다. 내가 그런 걸 좋아하니까. 외국의 이름 있는 분들의 글도 읽고 다른 사람의 글을 많이 읽잖아. 아무리 유명한 글이라도 내가 읽어 가지고 이해될 만한 것만 이해를 하지. 그거 하난 배짱이 있어요. 내가 읽고 재미없는 것은 나한테는 필요 없는 글이야. 학교 은퇴하고 25년이 되었는데 이런 나이가 되어 놓으니까 내가 읽고 싶은 것을 읽어. 처음에는 책을 읽으면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힘을 들여 읽을 생각을 했는데, 요샌 생각이 달라졌어. 내 맘에 드는 것만 봐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4호 2013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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