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속적인 스토리의 아름다운 무대재구성 <브리프 인카운터> Brief Encounter
원작에 불어넣은 새로운 무대 에너지
영국의 니하이 씨어터 프로덕션(Kneehigh Theatre`s Production)에서 제작하고 이번 가을에 브로드웨이로 수입된 <브리프 인카운터>는 1945년 영국에서 제작된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노엘 카워드(Noel Coward)가 쓴 단편스토리 `스틸 라이프(Still life)`를 직접 각색하여 영화화한 이 작품은 각자 가정을 가진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은 헤어져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짧은 여정을 그리고 있다. 교외에서 편안한 가정생활을 꾸리고 있는 로라는 일주일에 한번씩 기차를 타고 시내를 방문하는데, 역시 일주일에 한번씩 병원일로 시내를 방문하는 의사 알렉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몇 번의 우연한 만남이 더해지면서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만나는 순간마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헤어짐을 겪어내야 한다.
내용상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힘은, 주인공들이 겪게 되는 사랑과 심리적 갈등이 매우 섬세하게 묘사되어 공감대를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영화의 감독인 데이비드 린(David Lean)은 특히 여주인공 로라가 보수적인 사회에서 금지된 사랑을 하며 겪게 되는 심리적 갈등과 격정적인 사랑의 감정, 상실감 등을 때로는 객관적인 카메라 앵글로, 때로는 주관적인 로라의 심리독백으로 차분하게 묘사하고 있다.
얼핏 통속적인 스토리지만 섬세한 심리묘사가 장점인 이 영화를 넓은 공간의 무대에서 형상화하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각색과 연출을 맡은 엠마 라이스(Emma Rice)는 영화 내에서 섬세하게 묘사된 인물들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무대화하는데 성공하는데, 이는 그녀가 바라보는 사랑, 사랑을 할때 느끼는 격정적인 감정과 상실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연출자의 따뜻한 시선, 그리고 무대화
실제로 자신도 주인공 로라와 같은 경험이 있었고, 로라보다 다양한 선택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어 자신은 다른 선택을 하였다고 말하는 연출 엠마 라이스는 너무나도 차분했던 원작에 `Red! Passion!` 즉 에너지와 열정을 심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사랑의 감정과 아픔을 극대화하기 위해 연출가 엠마 라이스는 공연 적재적소에 연극적 장치들을 활용한다. 로라가 알렉과 함께 떠나야 할지를 고민하는 첫 장면에는 스크린에 투사된 대형 남편의 모습이 영사되며 로라를 짓누르고 있는 가정에 대한 의무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로라가 그 스크린을 뚫고 사라지는 동시에 영상 속의 남편과 합류되는 재미있는 영상은 역으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알렉의 감정을 극대화시켜 대변한다. 또 다른 재미있는 예를 들자면, 로라와 알렉이 사랑의 감정을 강렬하게 느끼는 순간마다 무대 뒤의 대형스크린에 넘실거리는 파도가 영사되고 둘은 사랑의 쓰나미에 휩쓸리는 듯한 모션을 연기한다.
스크린뿐만 아니라 다양한 무대장치들 또한 두 주인공의 심리묘사를 극대화시키는 장치로 활용된다. 두 주인공이 레스토랑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사랑을 교감하는 장면에서는 샹들리에를 이용해 공중으로 부양하면서 이제 막 사랑을 느끼게 되는 순간의 행복감을 아름답고도 재미있게 표현한다. 또한 적재적소에서 브리지로 내려와 활용되는 이층 무대 또한 로라가 겪게 되는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알렉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밤늦게 귀가한 날, 남편에게 아들의 사고 소식을 전해들은 로라가 2층으로 황급히 뛰어 올라가는 장면은 그 순간 로라가 겪게 되는 심리적 갈등과 죄책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남녀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은 적재적소에서 소품을 움직이는 코러스로 분하여 극적 재미를 더한다. 예를 들자면, 로라와 알렉의 격정적인 키스신에서 기차역의 카페주인 역을 맡은 아네뜨 맥러플린(Anette Mclaughlin)은 신문지를 들고 등장해 바닥을 쓸다가 키스를 하는 두 남녀의 몸을 휘어 감고 사라지는데, 작은 신문지 하나가 격정적인 키스에 몰두해 있는 인물들의 심리를 묘하게 살려낸다. 재미있는 점은 영화 내에서도 바로 그 장면에 길바닥에 버려진 신문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연출은 영화의 작은 요소까지 놓치지 않고 무대 위의 재미있는 장치로 활용하고 있는데, 이들은 주인공들의 심리를 극대화 시키는 동시에 연극적 재미를 선사한다. 원작 영화를 본 후 연출의 무대가 더 훌륭하게 느껴지는 이유 또한 바로 이러한 요소들에게 찾을 수 있다.
특히 돋보였던 것은 영화와는 다른 형식으로 결합된 음악의 활용이다. 원작 영화의 메인 테마로 유명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이 공연에서 로라가 직접 피아노로 연주하면서 감정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새롭게 합류한다. 또한 원작자인 노엘 카워드의 가사에 스튜 바커(Stu Barker)가 곡을 붙인 9곡이 새롭게 등장한다. 그 곡들 대부분이 영화에서 로라의 심리독백으로 내레이션 되었던 대사들에 곡을 붙인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 노래들이 주인공의 입을 통해 불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라는 사랑의 감정과 갈등을 겪는 순간마다 말없이 그 순간을 감내해내는데, 모든 조연과 악사들이 함께 모여 일정한 거리를 두고 로라를 응시하면서 노래를 합창한다. 이러한 합창의 방식은 묘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동시에 관객의 포커스를 로라가 겪고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집중시키도록 만든다. 이렇듯 영화가 클로즈업과 내적 독백으로 심리묘사를 이끌었다면 공연에서는 다양한 무대장치들의 효과와 음악을 활용하는 방식을 통해 무대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사랑의 감정에 대한 따뜻하고 유쾌한 시선, 관객의 호평
이 세상에 더 이상 새로운 무대효과는 없다고들 말한다. <브리프 인카운터>는 영상, 라이브 밴드 음악, 이층 무대 활용 등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무대 효과가 드라마와 상생작용을 일으켜 관객을 다른 세계로 이끄는 능력을 발휘하며 무대만이 살려낼 수 있는 특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또한, 여성 연출가가 사랑의 감정들에 대해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아기자기한 연출은 공연을 보는 관객들이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되짚어보게 만드는 근래 보기 드문 수작중의 하나였다. 더불어 매순간을 밀도 있게 채우고 있는 배우들의 호연으로 이루어지는 앙상블은 공연이 가야 할 방향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함께 공연을 본 지인은 근래 자신이 본 브로드웨이 공연 중 가장 으뜸인 공연이었다고 평가했고, 실제로 뉴욕 타임즈의 평가 또한 매우 호의적이다. 뉴욕 타임즈의 공연기사에는 일반관객들이 별점과 함께 간략한 평을 댓글로 달 수 있는데, 대부분의 관객들은 별 5개중 5개의 평점을 매기며 <브리프 인카운터>가 선사하는 유쾌함과 따뜻함에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86호 2010년 11월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