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 아름다운 이유는, 누군가와 평생 함께 살겠다는 엄청난 약속을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로 실행하기 때문이다. 로맨틱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당신과 함께 늙어가고 싶어요’라는 고백과 같다. 분명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겠지만, 그 험난한 과정을 거친 커플에게는 서로에 대한 깊고 묘한 애착심 혹은 믿음을 볼 수 있다.
다른 말로 그것은 사랑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해도 결혼하지 못하고, 함께 늙어가지 못하는 커플도 많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이런 슬픔을 무용으로 표현한다면 과연 어떤 작품이 될까?
어릴 적엔 평생 단 한 사람(첫사랑)만 좋아하고, 그(녀)와 결혼하는 게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완성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인생이 좀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진리를 아주 사소한 일을 통해 깨달았다. 내 가슴을 쿵쾅 뛰게 만드는 그녀는 내게 관심조차 없었고, 확신컨대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었다. 불면의 며칠 밤을 견딘 후 현실을 받아들이자 한결 인생은 살기가 쉬워졌다. 책에서 읽었던 아름다운 사랑은 결국 책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 후부터 꿈을 꾸는 듯 몽롱한 눈빛으로 주말의 명화를 보던 엄마와 누나가 괜히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A를, B를 만나 사랑했다가, 헤어졌다. 그리고 내게 뭐가 남았나? 그녀들은 내게 뭐를 남겼나? 나는 그녀들에게 무엇으로 남았을까? 사랑의 완성체라는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한 사랑인가? 그렇다면 그렇겠고 아니라면 아니겠다. 그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나와 그녀들의 사랑은 어땠을까’라는 점이다.
색깔로 비유하자면, 검정이라도 어떤 느낌의 검정색이었을까? 물감으로 검정색을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그냥 검정색 물감을 사용하는 것과 노랑, 주황, 보라, 갈색, 흰색 등 여러 색들을 섞어서 만드는 방법. 전자는 쉬운 만큼 단순하며 검정에는 검정색만 있어 좀 심심한 반면, 후자는 서로 다른 색들이 켜켜이 겹쳐져 뭔가 꽉차있는 느낌을 준다. 따로 있을 때는 둘 모두 검정으로 보이지만, 이 둘을 나란히 놓고 보면 분명 미묘한 차이가 생겨난다. 사랑도 그러하다. 더 나은 사랑, 더 좋은 사랑, 더 가치 있는 사랑은 말하기 어렵지만, 어떤 사랑이 더 끈끈하고 더 밀도 높은지는 말할 수 있다.
당신 곁에서 늙어가고 싶어요. 다른 말로, Je t’aime
피나 바우쉬는 독일 부퍼탈에 자리 잡은 초기인 1978년에 무용단원들과 <콘탁트프> kontakthof (contact yard) 라는, 늘 그래왔듯이, 남녀 관계에 관한 조금은 기묘한 인상을 풍기는 작품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에 그녀는 65세 이상의 무용을 배운 적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로 그 작품을 다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부퍼탈 극장 한 귀퉁이에 무용을 배운 적 없는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무용수 모집 공고를 붙였다. 그렇게 뽑은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로 재탄생된 <콘탁토프>는 현재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연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현대 무용사에서 모든 무용수들이 65세 이상의 비전문가들로 채워진 이런 작품은 없다. 피나 바우쉬는 왜 이런 ‘무한도전’에 가까운 시도를 했을까? 피나 바우쉬가 30대에 발표한 <콘탁토프>와 60대에 발표한 <콘탁토프>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리고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선 두 작품은 동작 몇 개, 장면 몇 개도 바뀌지 않은 채 무용수들의 나이만 바뀌었다. 그 결과, 피나 바우쉬가 나이 들었듯 작품도 나이를 먹은 인상이다. 마치 초연의 무용수들이 30여년 후 고스란히 다시 등장한 착각마저 든다. 거기에 무용수가 아닌 사람이 무용수이니, 움직임들은 무용이라기보다 동작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했다. 그렇게 나이든 육체들의 서투른 동작은 무대 위에 강한 현실성을 불러 일으켰다. 그로 인해 대부분의 관객들은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나이를 상상해보게 된다.
<콘탁토프>는 업라이트 피아노, 의자, 마이크, 커튼이 쳐진 스크린 등으로 미뤄 짐작컨대, 제목이 암시하듯 남녀가 만나는 댄스홀이 무대이다. 배우들이 한 명씩 무대 중앙으로 나와 다리를, 등을, 손바닥을, 치아를 보여줌으로써 공연을 시작한다. 그들 모두는 건강한 신체를 갖고 있으며, 젊으나 늙으나 그 사실은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도 남녀가 만나서 행하는 평범한 것들이다(피나 바우쉬의 노트에는 (서로) 만진다, ~ 와 함께 춤춘다, 바닥에 눕는다, 이야기를 한다, 홀로 춤을 춘다, 놀이, 도망간다, 영화를 본다 등의 단어가 적혀있다). 1930년대 재즈, 탱고풍의 음악에 맞춰 혼자 빨간 립스틱을 칠하고 자신의 팔에 키스하며 춤을 추는 할머니는 특히 인상적이다. 타인과 함께 춤을 출 때, 편안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25명의 무용수들 모두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곳에서 만남은 이뤄지지만, 어쩐지 그 만남이 사랑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는 느낌이다. 인연은 있었지만 연인은 되지 못한 과거의 몇몇 사람들과의 러브 스토리처럼, 부자연스럽고 어정쩡한 느낌 말이다. 그렇지만 후반부에서 조금 달라진다. 커플로 있을 때 그들에게서는 다른 깊이감이 스친다. 그렇다. 그들의 육체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랑에도 나이가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젊은 커플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어떤 묘한 분위기로, 전혀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비슷한 인상을 풍기는 것과 같다. 사랑하는 사람은 왜 닮을까? 아마 두 사람이 자주 바라보는 서로의 표정이나 행동을 무의식 중에 흉내 내기 때문이 아닐까.
피나 바우쉬는 “남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건, 참 아름다워요”라고 말한 적 있다. 그녀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삶이란, 작품에서처럼 서로 다투고, 장난치고, 약 올리고, 즐겁게 놀고, 사소한 일에 고통 받던 시간들을 모두 겪고 난 후, 비로소 마치 자신의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편하게 두 손을 맞잡고 서로 다른 두 명이 편안히 춤을 추는 모습을 볼 때이다. 그런 과정이 없이는 아무리 춤을 아름답게 춘다고 해도 어떤 깊이감이 부족하다. 초기의 마법 같은 순간이 지나면, 사랑도 현실이 된다. 더 이상 꿈을 꾸기도, 환상을 품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런 모든 갈등과 어려움, 즐거움, 행복 등을 겪고 다양한 추억이 겹겹이 쌓인 사랑은 견고하고 단단해 보인다. 여러 색들이 섞여있어 조금 다른 색이 끼어들더라도 쉽게 변화되지 않을 그런 밀도 높은 검정색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그와는 올 수 없었던 시간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흔해서 그 단어에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이 마음을 모두 담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자주 말한다고 해서, 크게 말한다고 해서 그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부족한 깊이를 채우기 위해 ‘영원히’, ‘항상’, ‘죽을 때까지’, 심지어는 ‘결혼하자’ 등의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그러면 ‘사랑해’라는 단물 빠진 말에 단물이 배어들긴 하지만, 사랑이라는 마음만으로 현실을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결국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는 이별을 경험한다.
‘나는 그(녀)와 헤어졌다’는 결국 ‘나는 그(녀)의 늙어가는 모습을 함께 하지 못 한다’와 같은 뜻이다. 나를 알기 전 과거의 그녀와, 나와 헤어진 미래의 그녀에게서 나는 완전히 배제 당한다.
기껏해야 나는 그녀와 사랑하던 그 얼마동안의 그녀모습만 봤을 뿐이다. 과거는 추억의 형태로, 미래는 상상의 세계에 머물 것이다. 그 어느 쪽도 현실이 되지 못한다. 거기에 바로 이별이 내포한 잔인한 고통이 잠복해있다. 물론 나이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궁금하지 않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사랑은 기본적으로 ‘영원’과 결부되어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끔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할까?’라는 추억이 달콤한 이유는 바로 그런 상실과 고통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별은, 서로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앗아갈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사랑이 나이 들면서 만들어낼 깊이감도 함께 앗아간다는 사실이다.
p.s. 피나 바우쉬가 만약 연인이자예술 파트너인 롤프 보르칙(무대와 의상디자이너)과 결혼했다면, 65세 이상이 된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여전히 같이 활동하면서 멋진 작품을 선보였을까 어느 순간 어떤 갈등으로 헤어져 완전 남남처럼 지내고 있을까? 피나 바우쉬는 <콘탁토프>를 그의 죽음을 예견하는 듯한 <카페 뮐러> cafe Muller 와 같은 해에 만들었고, 투병 중이던 롤프 보르칙은 2년 후에 죽었다. 그러니까 나이든 그녀에게 2000년대는 보르칙과는 함께 와보지 못한 시간이다. 그래서 30여년이 지나 다시 만든 이 작품은 마치 현실에선 이룰 수 없는 한 여름밤의 꿈처럼 애틋하다. 이제 그녀마저 세상을 떠나버린 지금, 이 작품은 내게 보르칙과 바우쉬의 이루지 못한 결혼 생활로 느껴진다. 이런 이유로 <콘탁토프>를 보던 3시간 동안 내 마음은 칼에 베인 듯 따끔따끔 했다.
<콘탁토프> Kontakthof
Tanztheater Wuppertal / Pina Bausch
Stadsschouwburg Amsterdam, Rabozaal.
Leidseplein 26, Amsterdam
Tel : 020-5237771
2010년 7월 10, 11, 13, 14일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84호 2010년 9월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