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국제연극제 LIFT 축제의 일환으로 6월 6일부터 바비칸 센터에서 공연된 뮤지컬 <네버모어>가 특이한 소재와 독특한 디자인, 색다른 형식으로, 신작이 귀한 런던 뮤지컬 시장에 신선한 경험을 제공했다.
`검은 고양이`로 유명한 시인, 에드거 앨런 포우(1809~1849)는 신비하고 암울한 분위기의 작품들로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해 온 불행한 천재로 유명하다. `애너벨 리` Annabel Lee 와 같은 감미로운 서정시부터 `갈가마귀` The Raven와 같은 음산한 분위기의 공포시에 이르기까지 유미주의로 불리는 독특한 미학적 필체를 선도해 온 세계문학사의 거장이다. 또한 추리소설의 창시자로서 `어셔 가의 몰락` 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 같은 작품을 통해 후에 아가사 크리스티와 코난 도일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만큼이나 어둡고 불행했던 그의 인생 자체가 많은 후대 예술가들에 의해 공연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다양하게 변주되는 포우의 삶
포우의 인생을 소재로 한 뮤지컬 역시, 이번 카탈리스트 극단의 <네버모어>가 처음은 아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만도, <갬블러>로 유명한 작곡가, 에릭 울프슨이 2003년 뮤지컬<에드거 앨런 포우>를 런던에서 쇼케이스로 선보인 후. 작년, 포우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독일 할레 오페라하우스에서 세계 초연으로 올렸다.
2006년 미국 워싱턴에서 매튜 코너 Matt Conner 작곡, 그레이스 반즈 Grace Barnes 작의 동명 뮤지컬 <네버모어>가 선보이기도 했다. 포우의 시 `갈가마귀` 의 한 귀절인 ‘네버모어’를 제목으로 한 카탈리스트 극단의 뮤지컬 <네버모어>는 작년 캐나다 초연을 통해 실험적인 형식과 디자인으로 호평받은 뒤 이번 런던 공연에 이어 11월 뉴욕 공연(The New Victory Theatre) 및 내년 초 캐나다 공연(Vertigo Theatre Centre)을 예정하고 있다.
이번 바비칸 센터에서 공연된 카탈리스트 극단의 <네버모어>는 포우의 독특한 문학세계와 신비로운 인생을 브레타 게레크 Bretta Gerecke 의 초현실적인 디자인을 중심으로 눈으로 보는 뮤지컬이다. 19세기 초의 의상을 과장된 선과 색상으로 재해석하며 우산처럼 넓게 펼쳐진 옷깃과 모자, 패티코트의 골조만 남겨 놓은 기이한 드레스, 1미터에 가까운 키 높은 중절모 등이 매우 인상깊다. 분장 역시 하얗게 분칠을 한 얼굴에 검은 눈화장을 강조하여 죽음의 세계와 공포감을 강조하였다. 스토리텔링 방식에 있어서도 내레이터가 극의 내용을 설명하고 배우들이 마임처럼 몸짓으로 내용을 설명하는 형식을 택하여 ‘보여주기’ 효과를 강조하였다. 주인공 에드거 포우 역의 스코트 슈펠리 Scott Shpeley 을 제외하고 나머지 여섯 명의 배우들이 돌아가면서 내레이터 역할과 다른 등장인물을 일인 다역으로 연기하였다.
상상력으로 담아낸 포우
막이 오르면 좀비에 가깝게 분장을 한 내레이터가 등장해 ‘한 남자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곧 두 번째 내레이터가 등장하여 ‘옛날 옛 적에’에 하면서 평생을 ‘혼자’로 살았던 외로운 남자, 포우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면 포우 역에 배우 스코트 슈펠리가 커다란 책과 깃펜을 들고 겁먹은 아이 같은 표정으로 등장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포우의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일찍 여의고 양부모(후원인) 밑에서 자라게 된 사연이 소개된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으로 집을 나가고, 홀어머니 밑에서 형과 누이동생과 자란 포우는 일찍이 어머니를 폐결핵으로 잃는다. 입양된 가정에서 양어머니와 정을 키우는가 싶더니, 그분마저 폐결핵으로 돌아가시고 무서운 양아버지와 남게 된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령과 헤어진 형과 누나에 대한 그리움으로 외롭게 자라야 했던 소년은 결국 사랑하던 이들을 모두 폐결핵으로 잃고 자신도 역시 같은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이는 ‘애드거 앨런 포우의 가상의 인생과 신비한 죽음’이라는 작품의 부제에 밝혔듯이 많은 부분이 실제가 아닌 가상으로 설정한 내용이다. 예를 들어, 여섯 살의 어린 포우가 무서운 양아버지 앞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도끼를 들고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장면이나, 어머니의 유령이 유리 새장에 갇힌 채 비명을 지르는 장면들은 모두 연출가이자 작가,작곡가인 조나단 크리스텐슨 Jonathan Christenson이 상상해 낸 포우의 망상들이다. 그래서 공연 중에는 포우의 작품에 등장하는 갈가마귀나 검은 고양이, 기괴한 코끼리 얼굴의 탈을 쓴 배우들이 음산한 모습으로 무대를 가로질러 가는 순간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어둡고 공포스런 작품을 썼던 작가, 포우의 머리 속에 나타났었을 법한 가상의 이미지들인 것이다. 브레타 게레크가 재현해낸 이러한 괴기한 이미지들은 포우가 극중 인생에서 공포나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등장한다. 여섯 살의 포우가 만나게 된 무서운 양아버지 알렌은 높은 모자를 쓰고 눈이 한 쪽 밖에 없는 괴물 같은 모습의 신사로 등장한다. 다정하던 양어머니가 병으로 요양을 떠나면 아직 어린 포우에게 기괴한 모습의 코끼리맨이 나타난다. 사랑하던 형이 폐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누나 로잘리마저 일로 멀리 떠나자, 포우는 음산한 모습의 괴조, 갈가마귀를 처음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이 괴물 같은 가마귀는 포우의 첫 아내 씨씨가 역시 폐병이 걸린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재등장하고, 그녀가 목숨을 잃는 순간에는 세 마리로 늘어나서 무대를 점령하며 공포감을 조성한다.
독특하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찬
이렇게 불행한 천재의 인생을 실제 기록과 상상의 이미지들을 섞어가면서 구성한 공연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팀 버튼의 영화를 닮았다. 카탈리스트 극단의 상임 디자이너, 브레타 게레크가 창조해낸 무대 위의 인물들은 팀 버튼의 영화 <가위손>이나 <유령신부>의 인물들을 연상시킨다. 그러한 배우들이 무대에서, 교묘하게 실제와 픽션의 경계, 현실과 악몽의 경계를 넘나들며 포우의 인생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들의 몸짓은 꼭두각시에 가깝다. 안무가, 로라 크루스키 Laura Krewski의 동작들은 단절되고 경직된 리듬으로 불행한 운명 앞에 힘없는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하는 포우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 에드거 역의 스콧 스펠리의 경우는 한 동안 내레이터들의 대사에 따라 마임에 가까운 동작을 보이기만 해서, 나중에 입을 열어 노래를 시작하면 그렇게 고운 미성을 가진 배우였다는 사실에 놀라게된다. 듀엣을 노래하는 상대역 엘마이라 역의 샤논 블랑세 Shannon Blanchet 역시 고운 음색의 가창력을 가진 배우이다.
음악은 내레이션에 가까운 소토보체 형식과 단순한 반복 리듬을 활용한 벌레스크 풍의 곡들이 주를 이루며, 공포심을 자아내는 음향 효과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에드거가 첫사랑 엘마이라를 만나는 장면에는 동요풍의 단순미가 있는 노래가 선보이고, 많은 장면에서 낡은 뮤직박스의 음악을 떠올리는 서정적인 선율도 소개된다. 주제곡 ‘에드거 앨런 포우’의 경우는 오페레타와 유사한 창법으로 반복적인 코러스 구절이 음산한 불행의 분위기를 전한다. 내레이터를 비롯해 여러 가지 역할을 돌아가면서 바쁘게 연기하는 여섯 명의 배우들은 모두 탁월하지는 않지만 안정된 가창력을 선보인다.
일반적이지 않은 실험적인 뮤지컬
대부분의 노래가 주요 등장인물이 아닌 내레이터와 코러스에 의해 불려진다. <네버모어>는 일반적인 뮤지컬 문법을 지키지 않는다. 카탈리스트 극단의 예술감독이자 연출가인 조나단 크리스튼슨이 직접 쓴 노래들은 연극성을 담고 있지만, 일반 뮤지컬 공연에서 들을 수 있는 발라드나 극적인 뮤지컬 넘버들과 비교하면 매우 단순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뮤지컬 <네버모어>는 일반적인 뮤지컬이라기보다는 시각적 미학과 연극적인 내레이션 구조를 가진 ‘노래가 있는 연극’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특이한 형식이긴 하지만 뮤지컬로 분류할 수 있는 이유는 공연 전반에 사용된 음악의 양과 무게감 때문일 것이다. 특히 마임에 가까운 동작들을 보충해주는 음악의 역할은 공연에서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내레이션의 대부분이 단순하지만 리듬과 선율을 가진 음악으로 전달된다. 이러게 디자인과 음악을 위주로 한 공연형식은 카탈리스트 극단이 그동안 꾸준히 시도해온 그들만의 무대 양식이기도 하다. <프랑켄스타인>,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꼽추` 를 각색한 <꼽추>, <카르멘 엔젤> Carmen Angel, <죄인들을 위한 노래> Songs for Sinners, <나의 완벽한 천국> 등을 통해서 카탈리스트 극단은 색채감이 화려한 초현실적 디자인과 독특한 선율의 음악을 공연의 주요 언어로 사용해 왔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적, 음악적 전달을 위주로 한, 언어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보편성으로 많은 국제연극페스티벌과 해외 무대에서 호평받아 왔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네버모어>는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 볼 수 있는 뮤지컬이 아닌 독특한 이미지와 형식으로 페스티벌이나 주요공립극장에서 단기 공연으로 접할 수 있는 일종의 실험적인 뮤지컬이다. 이러한 형식상의 독특함이 이 뮤지컬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특히 다양한 인물과 음악적 톤을 사용하는 일반 뮤지컬의 문법을 탈피한, 내레이터를 통한 스토리텔링 방식은 전체적으로 공연을 단조롭게 만든다. 인물들이 각자의 역할로서 생명감을 가지고 살아나지 못하고 일차원적인 인물로 전락하는 것이다. 화려한 시각적 이미지도 그러한 단조로움을 상쇄하지는 못한다. 초반의 인상적인 이미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금방 식상해 지고, 등장인물들은 진한 분장과 유사한 의상으로 인해 누가 누구인지를 구별하기 힘들어진다. 등장인물의 수가 상당히 많았는데도 커튼콜을 할 때 나온 인원이 7명밖에 되지 않아 굉장히 놀랐다. 특히, 단순하고 반복적인 형식의음악은 그러한 단조로움을 더욱 가중시키면서 작품의 매력이 반감된다. 그나마 작품을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은, 후반부로 치달으면서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노래가 상대적으로 많아지기 때문이다. 주인공 에드거가 자기 입을 열어 노래하는 부분이 많아지면서 비로소 관객들은 공감각적인 뮤지컬의 묘미를 잠시 누릴 수 있다.
에드거 앨런 포우의 극적인 인생과 작품세계를 담은 뮤지컬 <네버모어>는 소재가 제공할 수 있는 만큼의 극적인 매력을 십분 발휘하는 무대는 되지 못했다. 참신한 시도는 좋았으나, 생명력이 부족한 인물들, 디자인과 시각적 효과에 치우친 무대는 공연으로서의 입체감을 살리지 못했다. 특히 시각적인 부분조차도, 영화감독 팀 버튼이나, 독일의 엽기 동화를 뮤지컬화 했던 공연 <쇼크 헤드의 피터> Shockheaded Peter , 그리고 그에 출연했던 영국 밴드 ‘타이거 릴리` Tiger Lillies 등을 너무 닮았다는 점에서 ‘오리지낼러티’조차도 큰 점수를 줄 수 없었다. 그리고 내레이션 위주의 이야기 전달 방식은 화려한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을 듣는 정도의 효과밖에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버모어>는 참신한 경험을 제공하는 무대이다. 새로운 형식의 뮤지컬, 기이한 디자인의 공연, 새로운 이야기 방식으로서의 그 시도가 기특했다. 부족함과 아쉬움이 많이 남는 무대였지만, 올 하반기부터 계속될 뉴욕과 캐나다에서의 투어를 통해 더 많은 관객에게 보여지면서, 보다 다듬어지고 보완된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네버모어> 공연 비디오
https://www.artsclub.com/20092010/videos/nevermore/trailer1.html
카타리스트 극단 홈페이지
https://www.catalysttheatre.ca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83호 2010년 8월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