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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기계장치 누보 시르크 <오브제는 없다> [No.80]

글 |이동섭 사진제공 |Aurelien Bory, Theatre de La Ville de Paris 2010-06-08 6,015


오페라·오페레타·뮤지컬·누보 시르크로 이어지는 일련의 음악극 흐름 속에서 기계장치가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공연작품은 어디쯤에 위치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타인에게는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콤플렉스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 때 ‘저런 콤플렉스를 안고 어떻게 살아가나’ 싶을 정도로 심각한 것부터, ‘과연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사소한 것까지 다양하다.

 

콤플렉스가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당사자의 판단 과정 끝까지 쫓아가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쪽 눈이 처진 데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기만 해도 ‘내 눈을 보나?’ 싶어 눈길을 피하고, 심해지면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성향으로 바뀌어 버린다. 공연 역시 이와 같은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개개의 작품보다는 공연이라는 장르 자체에서 비롯되는데, 그 이름은 바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 이다.

 

 

 

 

누보 시르크와 기계 장치
그동안 웃음이 가득한 독특한 ‘동작극’ Theatre cinetique을 발표해 온 오렐리앙 보리 Aurelien Bory 의 신작 <오브제는 없다> Sans objet 는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대형 기계가 무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기계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라틴어로 ‘기계에 의한 신’ 또는 ‘기계장치의 신’을 의미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고대 그리스극에서 자주 사용하던 극작술로, 무대 한쪽 측면에 설치한 기계장치(일종의 기중기)를 타고 나타난 신이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하여 극의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이를 결말로 이끌어가는 방법을 일컫는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자면,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정점에 달했을 때 무대 한편에 설치해 놓은 기계를 타고 ‘뜬금없이’ 신이 나타나 모든 갈등을 일거에 해결해버리는 초난감한 상황이다 보니, 현대 극작술에서는 반드시 피해야 할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초기 오페라 작품들이 허술한 극의 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자주 사용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연극은 물론 오페라, 오페레타, 뮤지컬로 이어지는 음악극 흐름에서도 서커스적인 요소와 함께 반드시 피해야 할 무엇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일체의 공연에서 기계는 더 이상 보여서는 안 되는 은밀한 것이 되었다. 무대를 회전시키거나 주인공을 사라지게 만드는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며, 관객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꼭꼭 숨겨져 있어야 했다 (굳이 나타나야 한다면 <미스 사이공>의 헬기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 무대가 극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유흥거리로 치부되어 온 서커스라면 더더욱 그러하였다.

 

 


하지만 오렐리앙 보리는 ‘왜 그래야만 되는데?’라고 묻는 듯, <오브제는 없다>의 무대 정중앙에 1960년대에 자동차를  조립할 때 사용되었던 기계를 노골적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두 명의 남자 배우들을 무대에 등장시켜 그 기계를 이용해서 혹은 그 기계와 함께 연기를 하고, 춤을 추게 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무대 한 구석에 자리 잡은 기술자가 조작하는 조이스틱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는 로봇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로봇, 그에 상응하는 동작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아크로바틱 배우의 관계는 분명 상당히 낯설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기계의 작용과 인간의 반작용,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증인으로서의 관객이라는 구조가 성립된다는 점이다. ‘행위자 acteur 와 그 행위를 받는 자 receveur, 그리고 증인 temoin 만 있으면 연극이 된다’고 했던 연극 연출가 피터 브룩의 얘기에 비추어 보면, 이 작품은 구조적으로 충분히 연극 장르에 속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공연의 미래도 기계인가?
그렇다면 무대 중앙의 기계와 인간(배우)들의 삼중주 pas de trois 로 과연 무엇을 할까? 물론 인류의 평화를 부르짖거나 기계화된 현대사회를 풍자하거나, 혹은 점점 더 기계화되어 가는 인간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없다.


<오브제는 없다>는 90분 동안 그저 앞뒤 상하 좌우로 움직이며 물건을 들고 눈처럼 달린 카메라로 배우와 관객들을 바라보는 기계와, 그것을 사이에 두고 혹은 함께 노는 배우들의 하모니를 보여줄 뿐이다. 이쯤 되면 공연을 보는 관객들이 갖게 되는 의문은 대체로 하나 `도대체, 왜 이런 작품을 만드는가?` 로 모아진다. 그런데 더 신기한 점은, 공연장을 가득 채운 관객 중 아무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작품을 보고 있는가?’ 나는 공연을 보면서 오렐리앙 보리가 이런 작품을 왜 만들었는지 이해하기에 앞서, 내가 작품을 보고 있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무대 위 기계의 위치에 배우가 있다고 해도 과연 지금처럼 재미있을까? 만약 그랬다면 작품을 그저 유머러스한 동작극 한 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기계와 인간의 호흡에서 비롯된 놀라는 재미와 생각할 여지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저 기계의 자리에 우아한 말 한 마리를 둔다면? ‘말이 어쩜 저렇게 인간과 호흡이 좋을 수 있을까?’ 하며 놀라운 눈길로 작품을 보았을 것이다.

 

결국 오렐리앙 보리는 인간과 말의 자리에 인간처럼 움직이는 로봇을 둔 것뿐이다. 결국 기계와 인간의 호흡을 이용하여 한 편의 기괴한 누보 시르크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동안 공연 장르에서 거북한 존재였던 ‘무대 위 기계장치’는 관객들에게 놀라움과 유머를 안겨주었고,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무대 위에서 당당히 드러냈다. 콤플렉스는 역시 적극적으로 드러낼 때 비로소 극복되는 것이었다. 

 

 

 

영화 <아바타>를 본 지 얼마 지나지 않고 접한 이 작품을 통해 나는 ‘이제 기계장치를 배우로 이용한 작품도 나오는구나, 이런 방식으로 공연 작품을 만들어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바타> 이후 사람들은 영화의 미래가 오로지 3D 혹은 4D에 달려있다는 듯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미래의 영화는 스크린 위에 비치는 이미지를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을 벗어나 극장 안을 떠도는 가상의 이미지를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대 공연도 기존의 관람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체험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3D로 관람하기에 적합한 단순한 줄거리에 화려한 영상으로 가득 찬, 마치 게임영화  같은 <아바타>가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것처럼, 인간처럼 움직이는 기계장치(로봇)를 이용한 공연 역시 그에 적합한 내용을 갖게 될 때 뮤지컬계의 앤드루 로이드 웨버, 혹은 누보 시르크계의 태양의 서커스가 등장했을 때와 비슷한 파급력을 가질 수 있게 될까? 혹은, 영화가 스크린을 벗어나 공연을 닮으려 할수록, 태생 자체가 3D인 공연은 그와는 반대로 영화를 닮으려 노력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런 질문에서 우리는 한 가지 기본적인 사항을 간과하고 있다. 역사의 경험을 통해 그런 장르의 형식이나 외부적 조건의 변화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콘텐츠)이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 말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80호 2010년 5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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