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을 앞둔 뮤지컬 <블러드 브라더스>는 1992년 <핏줄>과 1998년 <의형제>로 잇따라 번안되며 국내 관객에게도 익숙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무려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관심을 받는 이유는 그 자체의 완성도도 있지만, ‘쌍둥이 형제의 엇갈린 운명’이라는 소재의 매력도 있다. 많은 장르에서 쌍둥이 캐릭터는 상반된 성격과 삶을 통해 서로에게 평생 영향을 주는 운명의 동반자들이다. 때문에 이들은 종종 대립하고 때로는 서로를 해치는 서스펜스 스릴러의 주인공이 된다. 범인의 알리바이가 중요한 추리물에서는 ‘알고 보니 쌍둥이’라는 반전의 클리셰가 관객을 종종 허탈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쌍둥이들은 다양한 장르에서 폭넓게 활용되며 대중문화 콘텐츠의 인기 캐릭터로 자리 잡고 있다.
닮은 얼굴, 다른 성격
외모가 똑같이 생겼다고 성격도 똑같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개그콘서트>의 이상호, 이상민 형제나,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의 비류(이은실)와 온조(이은주) 자매는 둘 다 유쾌하고 명랑한 성격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감초 캐릭터로 쓰일 게 아니라면 쌍둥이는 대개 상반된 성격과 재능으로 다른 운명을 걷는다. 그리고 이로부터 모든 드라마가 발생한다. 영화에서 쌍둥이 캐릭터가 모범생과 사고뭉치, 잘나가는 전문직과 하류인생 등으로 쉽게 대비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영화 <역전의 명수>의 쌍둥이들이 그 전형적인 예다. 일란성 쌍둥이인 이들은 약 1분 20여 초의 미세한 차이를 두고 태어났지만, 형은 주먹으로 학교를 평정한 건달이고 동생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우등생이다. 잘난 동생을 둔 탓에 늘 그의 뒷바라지를 해온 형은 급기야 동생을 대신해 군대나 감옥까지도 ‘대타’로 다녀온다. 철저하게 동생의 그늘에서 살아온 형이 이후 해프닝을 통해 제목처럼 인생 역전을 이뤄낸다는 전개는 정석이다.
일반적으로 쌍둥이 캐릭터의 성격 설정은 하나는 내성적으로, 다른 하나는 외향적인 성격으로 그리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이런 ‘쉬운’ 설정은 마찬가지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쌍둥이 시나리오 작가로 등장하는 <어댑테이션>에서 형은 스타 작가임에도 각종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똑같은 외모지만 대범한 성격을 지닌 동생은 여자에게 인기가 좋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열등감에 시달리는 쪽이 쌍둥이라는 또 하나의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으로 그려지기 십상이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
쌍둥이 캐릭터를 대비시킬 때 더 효과적인 설정은 샴쌍둥이다. 몸의 한 부분이 붙은 채 살아가는 샴쌍둥이는 성격이나 재능의 문제보다 신체적인 불편함에서 야기되는 태생적인 한계들을 가지고 있다.
패럴리 형제 감독의 포복절도 코미디 <붙어야 산다>는 그런 장애의 불편함을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이란성 샴쌍둥이인 두 사람은 연애를 비롯해 각자 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도무지 되는 일이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울분과 짜증으로 일관하기보다는 체념과 타협을 선택하며 절묘하게 사생활을 즐긴다. 장애를 노골적으로 희화화하는 면 때문에 취향이 엇갈릴 수 있지만, 정작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의 모습에선 ‘그래도 즐겁게 살자’는 감독의 낙관주의가 발견된다.
반면 한국 영화 <복숭아나무>의 샴쌍둥이에 대한 시선은 다소 슬프고 비관적이다. <붙어야 산다>의 쌍둥이처럼 몸의 일부가 붙은 게 아니라 뒤통수에 얼굴이 하나 더 달린 이들은 스스로를 ‘괴물’이라 생각한다. 각자의 장기를 보유한 다른 샴쌍둥이들과 달리 목 아래로 모든 것을 공유하는 까닭에 한 사람의 결정으로 자살을 할 수도 없다. 어두운 집 안에서 30여 년을 살아왔지만 형은 조용하고 운명에 순응하는 성격이고 동생은 소설가를 꿈꾸며 바깥세상을 지향한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똑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통스러운 삶을 함께 살아야 하는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는 결국 눈물로 끝나고 만다.
증오의 대상으로서의 쌍둥이
똑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차별적인 환경에서 살아온 쌍둥이에게 다른 한쪽은 완전한 타인보다 더 증오의 대상이 된다. 뮤지컬 <삼총사>에서 루이 13세와 쌍둥이로 설정된 리슐리외 추기경이 그렇다. 이미 최고의 권력을 손에 넣었음에도 왕위 찬탈을 노리는 그에게 루이 13세는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라 장애물일 뿐이다. 한편 쌍둥이 사이에 공통의 이성이 등장하면, 극은 급속히 신파나 치정극으로 돌변한다. <셜록홈즈-앤더슨가의 비밀>에서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 아담과 에릭 앤더슨도 마찬가지다. 다정하고 섬세한 성격의 동생 에릭은 권위적이고 난폭한 아담을 위해 늘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억눌렀던 욕망은 존속상해라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고 만다.
<블러드 브라더스>는 이런 핏줄의 위력과 운명의 불공평함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가난 때문에 어릴 때 헤어진 후 운명처럼 다시 만난 쌍둥이가 핏줄의 힘으로 의형제를 맺지만,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다. ‘왜 그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설움은 혜택받은 쌍둥이 형제에 대한 증오로 바뀌며 참극의 도화선을 당긴다. 쓰카모토 신야 감독의 영화 <쌍생아>는 기괴한 비주얼을 활용해 쌍둥이 형제의 엇갈린 운명을 더욱 공포스럽게 표현한다. <블러드 브라더스>와 달리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버려진 쌍둥이 동생은 의사가 된 형을 찾아내 그를 우물 안에 가두고 형 행세를 한다. 마치 형에게 빼앗겼던 자신의 것을 돌려받기라도 하는 듯한 동생의 폭력적 행보는, 형이 우물에서 탈출해 그를 죽이면서 마무리된다.
이처럼 한쪽 쌍둥이에만 주어진 축복은 필연적으로 다른 쌍둥이에게는 상대적 박탈감과 증오를 심어준다. 상처받은 쌍둥이들은 대개 이로부터 공멸이나 자멸의 길을 선택하며 비극적인 운명에 종지부를 찍는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9호 2014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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