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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S] 영원한 미의 추구, 오스카 와일드 [No.125]

글 |나윤정 2014-03-03 4,907

19세기 강렬한 인생을 살았던 오스카 와일드.
그의 세계가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면 어떤 모습일까?
즐거운 상상을 곧 현실로 마주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그의 동화 『욕심쟁이 거인』을 각색해 만든 창작뮤지컬
<로스트 가든>이 개막했고, 올 10월에는 『도리안 그레이』가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명성만큼이나 드라마틱했던
오스카 와일드의 삶 속으로.

 

 

                                     

 

 

아름다움 그 자체

“예술이 삶을 모방하기보다는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

오스카 와일드(1854~1900)는 19세기 유미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순수한 미 자체만을 추구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주창자다. 그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1874년 옥스퍼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진학한 후 존 러스킨과 월터 페이터의 영향으로 유미주의를 확립해갔다. 흥미롭게도 와일드는 당대 최고의 댄디보이였다. 의상 개혁이 종교개혁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던 만큼 웨이브 장발과     세련된 모자, 실크 스타킹과 비로드 반바지로 자신을 어필했다. 당시 그의 패션은 지식인의 상징적 아이템이 돼 유미주의 추종자들 사이에 유행을 일으켰다. 아름다움의 추구에 패션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그는 유미주의 운동의 일환인 이성 복식 운동을 열렬히 지지했고, 1882년 미국에서 남성복과 여성복에서의 개선 방안에 대한 순회강연을 펼치는 열정을 보였다. 추후 패션계가 댄디즘에 동성애적 코드를 부여한 것은 와일드의 공이 컸다.
와일드는 화려한 외향만큼이나 재기도 뛰어났다. 풍부한 교양, 종교와 사회의 위선을 향한 지독한 독설로 사교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좌담과 강연에서 달변가로 군림한 그의 명성은 미국까지 전해졌다. 1882년 미국의 초청으로 영국 문예부흥과 신이교주의의 선양을 위한 강연을 맡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 입국 당시 세관에서 “신고할 것은 내 천재성밖에 없다”고 말한 유명한 일화에서 그의 거침없는 면모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모난 돌이 정을 맞는 법,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많아질수록 빅토리아 시대 보수 세력의 멸시와 조롱은 더욱 거세졌다.
그럼에도 와일드는 승승장구했다. 특히 작가로서 그가 이뤄낸 성과를 빼놓을 수 없다. 1888년 발표한 첫 동화집 『행복한 왕자와 다른 이야기들』에서 명작 『행복한 왕자』는 와일드의 순수성과 세상을 향한 풍자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함께 수록된 『욕심쟁이 거인』은 뮤지컬 <로스트 가든>의 원작으로 이기적인 어른들에게 아이들과의 소통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욕심쟁이 거인이 자신의 정원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내쫓은 후 추운 겨울이 계속된다는 것을 반성하고, 정원의 담장을 허물어 아이들과 봄을 함께 맞이하며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다.
1891년 작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와일드의 유일한 장편소설로, 그의 문학적 명성을 한층 끌어올려 준 작품이다. 젊은 귀족 도리안이 초상화가 자기 대신 늙을 수 있다면 영혼을 팔겠다는 맹세를 하고, 이후 그가 쾌락주의에 빠져들수록 초상화가 점점 추해져 결국 이를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다. 와일드의 유미주의적 세계관이 집약된 작품으로 도리안은 곧 와일드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환상적인 설정과 날카로운 통찰력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이후 많은 예술가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다양한 장르로 재탄생되었다. 2009년 벤 반스, 콜린 퍼스 주연의 영화로 대중에게 소개됐고, 올해는 창작뮤지컬로 도리안 그레이를 만나볼 수 있다.
파격적인 소재로 논란의 대상이 된 1893년작 희곡 『살로메』도 빼놓을 수 없다. 마태복음의 유대왕 헤롯의 세례요한 참수 사건을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성서를 모독했단 이유로 상연이 금지됐다가 1896년 루브르 극장에서 초연됐다. 와일드는 억압적인 시대 사상에 대한 반발로 극 속에 19세기 말의 반항적인 에로티시즘을 담아냈다. 당시 많은 이들이 퇴폐적인 내용에 충격을 받았지만, 아름답고 파괴적이었던 살로메는 팜므파탈의 전형으로 이미지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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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역사적 순간?

희대의 동성애 스캔들

`내 심장은 당신의 사랑으로 인해 피어난 장미입니다.”


중년의 와일드가 이토록 감미로운 구애를 보낸 이는 놀랍게도 16세 연하남. 1891년, 와일드는 두 아이를 둔 가장이었음에도 옥스퍼드대 꽃미남 알프레드 더글라스를 열렬히 사랑하게 된다. 그들의 위험한 사랑은 더글라스의 아버지인 퀸스베리 남작에 의해 희대의 동성애 스캔들로 세상에 알려진다. 1895년 퀸스베리 남작이 사교 클럽인 앨버말에 ‘오스카 와일드에게 남색 혐의를 제기한다’는 모욕적인 경고 메시지를 뿌렸고, 이에 와일드가 그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며 맞불 작전을 놓았다. 와일드는 “동성애는 그리스 시대부터 시작된 아름답고 고결한 애정 행위”라고 항변했지만, 시대는 냉정했다. 심지어 대표작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까지 동성애 혐의의 증거물로 제시됐다. 분노에 찬 재판관은 풍기문란의 죄목으로 그에게 2년의 강제노동형을 선고했다. 와일드의 명예는 한순간에 땅에 떨어졌고, 출소 후엔 국적마저 박탈당했다. 그는 더글라스가 있는 프랑스로 건너가 사랑을 이어가려 했지만, 상대의 마음은 쉬 변해버렸다. 결국 그는 프랑스의 한 골방에서 가난과 지병으로 초라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묘비를 뒤덮은 키스 세례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리고
우리가 단단한 바위 무덤 속에 누워있을 때
로비, 나는 자네에게 몸을 돌리며 속삭이겠네
로비, 우리 저 소리를 못 들은 체하세”

1900년 겨울, 파리의 페르라셰즈 공동묘지에 잠든 와일드. 그의 묘비명에 등장하는 ‘로비’는 마지막 사랑이었던 더글라스의 애칭으로, 그를 향한 와일드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잘 설명해준다. 와일드의 격정적인 삶은 오늘날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또 그만큼 그의 묘비 앞엔 독특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첫 시작은 1999년, 누군가 그의 묘비에 키스를 했고 붉은 립스틱 자국을 선명히 남겼다. 와일드에게 경외심을 표하는 이 과감한 몸짓에 사람들이 열광했고, 하나둘 장밋빛 키스 자국이 그의 묘비를 뒤덮었다. 이 엄청난 키스 열풍 때문에 립스틱 자국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이 석재에 스며들어 특단의 조치가 취해질 정도였다. 2011년 11월 30일, 묘비에 보호 유리벽을 설치하는 기념식이 진행돼 화제를 모았다. 이 자리에는 와일드의 유일한 손자인 멀린 홀란드가 참석했다. 하지만 방어벽도 와일드를 향한 많은 사람들의 애정을 잠재우지 못했다. 그의 묘비 주변은 지금도 불멸의 예술가를 향한 붉은 키스 자국이 가득하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5호 2014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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