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나는 스스로를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라 말한다. 때문에 작품 선택에 있어서도 매우 신중을 기한다. 자신에게 수도 없이 ‘이 작품을 하면 어떨까, 과연 내가 할 작품일까’와 같은 물음을 던져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다른 작품을 연습하던 상태에서 캐스팅 제의를 받은 이번 공연은 더욱이 그랬다. 하지만 마음 맞는 배우들, 스태프와 좋은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는 지금, 그녀는 본인의 선택에 누구보다 만족해하고 있었다.
창작은 고통보다 즐거움을 주는 작업
“많은 분들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면에서 창작을 어렵게 생각하시는데, 창작 작품이라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연출님이 수년전부터 준비를 해오면서 작품의 방향이 확실히 잡혀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저는 오히려 기존 배우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 없기 때문에 캐릭터를 제 것으로 만드는 데 더 수월했고요.”
흔히 창작의 고통을 뼈를 깎는 그것에 빗대곤 하지만 그녀에게선 전혀 힘든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바로 공연에 적용을 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창작품은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여지가 굉장히 많거든요. 저희 작품도 매회가 똑같지 않고 계속 바뀌고 있는데, 바로 이런 점이 창작뮤지컬의 매력인 것 같아요”
공연에 적용되는 새로운 시도들은 대부분이 연습과정을 통해 얻은 것이다. 작품 자체가 지닌 코믹성과 더불어 유독 마음이 잘 맞는 배우들 덕에 연습실은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공연에서 소품으로 사용된 나무가 뽑히는 장면 등도 연습무대에서 빚어진 실수를 실전에 활용한 경우다. “나무가 뽑혔으니까, 다시 안 뽑히게 밟는다든가 이런 부분도 다 연습무대에서 나온 거예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덕에 힘든 줄도 모르고 연습에 임하지만 때론 그것이 독이 될 때도 있다. 무대 위, 연습실과는 사뭇 다른 배우들의 진지한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경우가 그렇다. 한 번은 넘버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린 적도 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순신장군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부르는 마지막 노래였는데, 그날따라 (임)기홍 오빠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노래를 만족스럽게 못했거든요. 그래서 자책을 하는 특유의 표정을 지으면서 절 바라보는데,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결국엔 배우 세 명 모두 웃음이 터져서 노래를 못 했어요” 물론 어느 정도의 실수는 공연에 재미를 더한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반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날은 그 도를 넘어섰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박수를 보내준 관객들에게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영웅을 기다리며>는 ‘창작팩토리 우수작품 제작지원’ 최우수작에 선정되었고, 관객들에게도 좋은 평을 받으면서 오픈 런이 확정된 상태다. 이에 인기요인을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묻자, 많이 웃을 수 있다는 점을 일순위로 꼽는다. “사실 이순신장군님껜 조금 죄송스러운 부분도 있어요. 제가 생각하는 그분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구한 전쟁영웅이신데, 저희 작품에서는 너무 코믹하게 그려지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난중일기에 재미있는 부분도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부정적인 평가 또한 감수해야 할 몫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모든 공연에는 호불호가 나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공연의 개성이 강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저희가 하는 손동작, 발동작 하나에도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데, 관객들이 보는 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뿐이라 전달이 제대로 안 될 수도 있겠구나 싶어요. 그럴수록 더 진실 되게 다가가기 위해 더 많은 타당성과 정당성을 찾기 위해 저희가 노력해야죠. 또 관객 분들의 취향이 모두 같을 순 없으니 당연한 거죠.”
그러나 사실 박혜나는 공연 중에는 리뷰를 잘 챙겨보지 않는 편이다. 무섭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지만 아무래도 배우도 사람이기에 평가 하나 하나에 동요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씩 리뷰를 남겼는데, 모르냐고 묻는 분들이 계세요. 저는 정말 안 봤기 때문에 몰라서 그런 건데, 죄송하더라고요.” 대신에 공연이 막을 내린 후엔 꼼꼼히 챙겨보며 다음 공연에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자료로 참고하고 있다.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막딸’
“딱, 너다!” 박혜나가 ‘막딸’을 연기하며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다. 그만큼 그녀는 극중 ‘막딸’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몰입도가 큰 까닭도 있겠지만, 내면에 존재하던 ‘막딸’의 모습이 작품을 통해서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제 안에 원래 이런 모습이 있긴 했지만 작품을 하면서 더 닮아가는 것 같아요. ‘막딸’은 앞으로 더 찾을 것도 많고, 표현해보고 싶은 것도 많은 캐릭터에요. 제가 만들어낸 캐릭터이기 때문에 더 애착이 가는 만큼 더 잘하고 싶은 마음도 커요.”
서울이 고향인 그녀에게 경상도 사투리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아무리 똑같이 한다고 해도 그곳에서 나고, 살던 분들과 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과는 차이가 있잖아요.” 더구나 팀 내에 경상도 출신의 배우나 스태프도 없어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다른 공연을 같이 했던 스태프의 도움으로 마스터했지만, 경상도출신의 관객들이 들으면 아무래도 티가 나지 않겠냐며 매 공연마다 가슴을 졸인다고.
이때, 옆에 있던 홍보담당자가 공연을 본 부산 관객이 ‘박혜나’가 부산사람이냐며 물은 적이 있다는 말을 전해왔다. “아, 정말요? (홍보담당자에게 다가가 녹음기 마이크를 들이대며) 여기에 대고 말씀해주세요(웃음). 이런 얘기 들으면 정말 너무 좋아요. 정말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좀 전까지만 해도 사투리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더니, 사소한 칭찬 한 마디에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주위에서도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에는 더블캐스팅을 포함해 총 8명의 배우가 있지만, 여배우는 같은 역을 맡고 있는 ‘유정은’과 ‘박혜나’ 둘 뿐이다. 때문인지 두 배우는 유독 더 친밀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더블캐스팅이라는 것이 경쟁을 할 수도 있어요. 배우라면 누구나 더 잘하길 바라는 욕심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유)정은 언니와 저는 다행히도 서로의 개성이 너무 틀려서 그런 감정을 갖기도 전에 없어져버렸어요.”
같은 배역을 연기하고 있지만, 두 배우는 모두 자신만의 매력을 살려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덕분에 관객들은 더욱 풍부해진 캐릭터를 만나볼 수 있게 됐다. ‘막딸’ 외에도 ‘요코’ 역을 맡아 두 가지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힘든 점도 있었을 듯했다. “처음엔 옷 갈아입는 부분이 쉽지 않아 실수도 많이 했는데, 이제는 익숙해져서 많이 좋아졌어요. 또 한 작품에서 이것저것 경험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도움이 되요. ‘요코’란 인물도 워낙 역사가 많은 캐릭터라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바꿔보는 재미도 있고요.”
두 가지 캐릭터를 연기하려니 무대 위에서 쉴 틈이 없이 움직여야 한다. 게다가 뮤지컬 <싱글즈>를 공연하면서 연습을 시작했기 때문에 체력적인 부담도 컸을 듯했다. “사실 저도 힘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사람도 휴식을 취할 때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보다 책을 읽는다거나 하는 것도 휴식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게다가 <싱글즈>를 같은 해에 두 번이나 하다 보니 생활자체가 그곳에 매였었는데, 여기에서는 캐릭터 자체도 자유분방해서 연습실이 마치 놀이터 같았어요.” 물론 컨디션이 좋지 못한 날도 있지만 그녀는 그럴 때일수록 더욱 집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날엔 객석에도 전해지는 것 같아 너무 죄송하죠. 그래도 집중을 하다보면 힘든 것도 잊게 되는 것 같아요.” 자신보다 관객을 먼저 생각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에 앞서 진정한 배우의 향기가 느껴졌다.
배우, 그것은 우연으로 시작된 필연
“그런 일은 정말 끼 많고,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인 줄 알았어요” ‘박혜나’는 학창시절의 자신을 배우라는 직업은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정말 평범했던 아이라 회상했다. 그런 그녀에게 기회는 정말 우연히 찾아왔다. 20살 재수시절, 공부가 적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지쳐갈 때 즈음에 문득 노래를 배우고 싶어졌다. 이후 음악감독을 만나 노래를 배우게 되면서 뮤지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연극영화과로 진학했다. 이 모든 게 우연으로 시작되었지만, 어렸을 때를 회상해보면 ‘박혜나’는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는 것을 즐겼던 아이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게 필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무대에 첫 발을 내딛은 것은 2006년 <미스터 마우스>의 ‘양양이’ 역을 맡으면서부터다. “대학뮤지컬페스티벌에서 <그리스>란 작품의 ‘샌디’ 역을 맡았었는데, 당시 대표님이 잘 봐주셔서 졸업을 앞두고 오디션을 보러 오란 연락을 받았어요. 당시엔 학교를 졸업하면 무대에 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전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박혜나’는 당시에도 나이 어린 ‘양양이’와 나이 많은 ‘엄마’ 역을 동시에 소화해내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극중 다리가 불편해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는 ‘엄마’ 역을 위해 목발을 짚고 대학로를 활보했던 것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뮤지컬 <햄릿>, <싱글즈>, 연극 <룸넘버13> 등에서 성실하게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사실 이 일이 제 일이라고 생각한지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지금은 배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너무도 평범했던 제게 특별한 기회가 주어진 것 같고요”
박혜나는 스스로를 정해진 틀이 없는 배우라 표현했다. 출연 작품이 많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다양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인으로서는 특별히 어필할 만한 이미지가 없다는 것에서 아쉬움을 보이기도 했지만, 어떤 캐릭터든 소화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배우에게는 더없는 축복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사실 기회가 닿아서 하게 된다면 어떤 역이 주어지든 최선을 다할 자신이 있어요” 배우로서 아직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에겐 모든 경험이 다 소중하고 도움이 된다는 의미였다.
얼마 전에는 <황야의 물고기>와 <청춘18대1>을 봤는데, 너무 좋았다며 꼭 한 번 다시 연극무대에 서보고 싶다고 했다. “저는 뮤지컬과 연극을 구분을 두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노래가 있고 없고의 차이 외에 살아있는 무대 연기라는 점에서는 같으니까요. 물론 연극과 뮤지컬이 가지고 있는 형식 자체는 다를 수는 있지만, 저는 그 형식조차도 자유롭게 살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무대에서만큼은 임진왜란 시대의 ‘막딸’로 살아있길 바랬던 이유이기도 했다.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냐’는 물음에 박혜나는 “밝고 긍정적인 기운을 줄 수 있는 배우”라 답했다. 더불어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다며, 앞으로 그런 배우가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배우 박혜나의 연기에 웃음 짓는 관객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는 지금, 그녀는 이미 그 바람에 성큼 다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