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의 <햄릿>이 마침내 무대로 돌아온다. 국립극단은 7월 5일부터 29일까지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의 <햄릿>을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인다. 2019년 ‘국립극단에서 가장 보고 싶은 연극’ 설문에서 관객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이듬해 2020년 국립극단 70주년 기념 라인업으로 전격 편성돼 제작까지 마쳤으나 코로나19 확산세로 끝내 관객을 만나지 못했던 작품이다.
국립극단 온라인 극장에서 공개됐던 <햄릿>은 단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극의 전개와 압도적인 미장센, 광기로 치부할 만큼 파격적인 연기로 평단의 호평에 승선하며 끊임없이 관객의 재공연 요청을 받아왔다. 화면을 넘어 드디어 관객 앞에 서는 <햄릿>은 17세기 원작이 쓰인 당시 사회 관습과 통념을 완전히 벗어내고 현대적인 얼굴로 분했다.
1601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가장 먼저 집필된 『햄릿』은 작가의 비극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이라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셰익스피어가 당시 주로 희극과 역사극에 집중해 작품 활동을 펼치면서 동시대의 다른 비극들과는 달리 『햄릿』에는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기질이 강하게 묻어있다. 중세 덴마크 엘시노어의 크론보르 성을 작중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세련된 작품의 선천적 기질과 시대를 뛰어넘는 이야기의 보편성으로 현재까지 수많은 예술작품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연극으로서의 <햄릿> 또한 수많은 변주로 재탄생해 원작이 쓰인 이래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작품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국립극단 역시 앞서 두 번에 다른 <햄릿> 프로덕션을 진행한 바 있다. 2001년 첫 번째로 국립극단 무대에 오른 <햄릿>은 국립극단 출신 탤런트 김석훈이 햄릿 역을 맡고, 민중극단의 정진수 연출이 번역 및 연출을 담당했다. 두 번째는 칼 대신 총을 든 파격적인 햄릿을 콘셉트로,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의 예술감독을 역임한 독일 연출가 옌스-다니엘 헤르초크가 연출을 맡았다. 2007년 <테러리스트 햄릿>이라는 제목으로 관객을 만난 공연은 숱한 화제를 낳으며 이듬해 앙코르 되기도 했다. 한편 한국 최초의 <햄릿>은 故이해랑의 연출작으로 국립극단의 모체가 된 민간 극단인 신협이 1951년 9월 한국전쟁 중에 공연했다. 당시 햄릿을 맡았던 故김동원 배우는 지금도 ‘영원한 햄릿’으로 불린다.
연출가 부새롬과 각색가 정진새는 원작이 가진 이러한 위상과 가치에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발단으로 새로운 시대를 반영한 <햄릿>을 탄생시켰다. 420여 년 전의 이야기는 정교한 심리묘사와 과감한 시대성의 반영, 창의적인 극작과 연출로 현 한국 연극계를 견인하는 두 예술가의 손과 머릿속에서 집요하게 해체되어 오늘날의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정진새 각색가는 “단지 원작이 대단하다는 이유로 이해가 되지 않는 연극을 수용해야 한다면 그것은 연극 본연의 매력을 외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라며 “동시대의 관객들이 납득할 수 있는 여부를 기준으로 원작 숭배자와 타협 없이 마음껏 각색을 진행했다”라고 밝혔다.
원작이 따르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고대 서양의 원전을 출처로 하는 말들, 중세 유럽 왕국에서 나올법한 예법과 시적인 대사는 대거 수정됐다. 당시 사회 통념에서 비롯된 여성을 향한 차별과 혐오적 요소도 현대의 관객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들어냈다. 각색으로 비워진 극의 행간은 연출가와 각색가가 함께 상상한 감각과 의식, 그리고 한국 사회의 현실을 촘촘히 덧입혀 고전 명작을 현대적 수작으로 안착시키고자 했다. 극작을 완성하는 데만 1년 이상이 걸렸다.
햄릿의 성별 변화 역시 흥미롭다. 원작이 탄생한 당시 ‘당연히’ 남성이었던 왕위계승자 햄릿은 여성으로 바뀌었다. 성별은 변했지만 햄릿 공주는 여전히 ‘당연한’ 왕위계승자이자 검투에 능한 해군 장교 출신이다. 햄릿의 상대역인 오필리어는 남성으로 바뀌었고 길덴스턴, 호레이쇼, 마셀러스 등 햄릿 측근 인물들에도 적절히 여성을 배치했다. 성별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잊게 하는 배우들의 농도 짙은 연기는 성별을 떠나 단지 한 인간으로서 인물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한다.
작품은 선과 악의 구분지도 제거했다. 햄릿의 대척점에 서 있는 클로디어스를 포함해 작중 인물들이 행하는 선택과 결단을 완전히 옹호하거나 비판할 수 없도록 각 인물의 행동마다 적절한 정당성을 부여했다.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욕망을 좇아가는데 나름의 명분과 사리를 부여한 극화는 선인과 악인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림으로써, 극장을 떠나는 관객의 발걸음에 인간 본성에 관한 질문을 끊임없이 눌어붙도록 한다.
부새롬 연출은 “인간이 살면서 완벽하게 옳을 수만은 없고 서로 간의 명분과 옳음이 달라서 부딪히게 되는 것”이라며 “그 누구도 완벽하게 악인일 수 없고 선인일 수 없다는 지점이 작품을 더욱 암투적이고 재밌게 만드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또한 “햄릿을 해석하고 연출하는 데는 모두 다른 생각이 있겠지만, 왕이 되려고 고군분투하는 소위 ‘계승자 햄릿’을 나는 보고 싶었다”라며 특정 국민이나 민족, 계층을 대표하기보다 그저 왕좌의 게임에 임하는 진지한 플레이어로서의 햄릿을 그렸다.
여성 햄릿을 내세운 데 대해 부 연출은 “햄릿이 여성이어도 남성과 다를 바 없이 왕권을 갖고 싶고, 복수하고 싶고, 남성과 같은 이유들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성별을 넘어 단지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에 집중하는 것이 작품의 본질을 보여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라며 “나중에 이 각색본으로 누군가 다시 공연한다고 했을 때, 햄릿을 남자가 하든 여자가 하든 관계없다. 그것이 나와 각색가가 의도한 것이다”라고 전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이봉련이 햄릿 공주를 맡아 복수의 칼을 겨눈다. 135분에 달하는 공연 시간 동안 은밀하고도 광기 어린 연기로 감정을 쏟아붓는 그의 연기는 익숙하면서도 완벽히 새로운 햄릿의 탄생을 알린다. ‘사느냐, 죽느냐’ 휘몰아치는 폭풍우가 지나가고 파국의 결말을 마주하는 순간, 관객은 긴 꿈에서 깨어난 듯 참혹한 현실을 마주한다. 이봉련은 <햄릿>으로 2021년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연기상을 받았다.
이봉련의 햄릿 곁에는 대체불가한 연기력으로 무대와 매체를 넘나들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배우들이 함께한다. 배우 김수현이 형이 죽은 후 왕국의 왕이 된 햄릿의 숙부 클로디어스로 합류한다. 햄릿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나름의 인간미를 갖춘 인물인 동시에 극이 전개되면서 햄릿에 대한 두려움으로 조카 살해를 계획하며 인간의 길을 저버리는 잔혹함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스웨트>, <당신이 밤을 건너올 때>, <굿닥터>, <토카타>, <리차드 2세>, <헤다 가블러> 등 한국 연극계의 허리를 받드는 대표 얼굴 김수현은 지난 2022년 국립극장에서 선보인 <햄릿>에서는 호레이쇼 역할을 맡은 흥미로운 이력이 있다.
햄릿을 추방하고, 오필리어를 미쳐 죽게 만들며, 레어티즈의 복수심을 유발해 작품의 플롯을 비극적 결말로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역할의 폴로니어스는 배우 김용준이 연기한다. <82년생 김지영>, <세자매>, <화려한 휴가> 등 다수의 영화 작품과 <나무 위의 군대>, <누란누란> 등의 연극에 출연한 김용준은 올해 60회 백상예술대상에 노미네이트되면서 강렬한 카리스마와 부드럽고 섬세한 감정 표현력을 동시에 지닌 뛰어난 연기술을 인정받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심적으로 매우 괴로워하던 햄릿을 고립시킨 가장 큰 원인이자 자신의 죽음으로 햄릿에게 클로디어스를 죽일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는 왕비 거트루드 역은, 영화 <한공주>와 연극 <거의 인간>, <멕베스>, <20세기 블루스> 등 다수의 작품에서 뛰어난 캐릭터 일체감을 보여준 배우 성여진이 맡았다. 이외에도 류원준(오필리어 역), 안창현(레어티즈 역), 신정원(오즈릭 역), 김유민(호레이쇼 역), 김별(마셀러스 역), 김정화(버나도 역), 이승헌(로젠크란츠 역), 허이레(길덴스텐 역), 노기용(레날도 역) 등 한국 연극의 현재를 꾸리고 미래를 책임져 나갈 실력 있는 후배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햄릿>은 흔히 복수극이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장의 청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기성세대가 만든 부조리로 부서져 가는 햄릿의 모습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기성세대로 대표되는 클로디어스 본인 또한 자신이 계획한 음모에 의해 파국을 맞이하는 결말로 폭주하는 청춘의 일대기를 그리는 작품이다. 이는 세대 간 혐오가 가속화된 한국 사회의 실상에 <햄릿>이 들어맞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다.
특히 이번 <햄릿>은 “네가 가진 것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잘 따져 봐라.”, “네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모르지?” 등의 대사를 반복시키면서 국가 개발과 경제 발전을 주도했던 기성세대와 선진국의 주역으로 살아가고 있는 젊은 세대 사이에 가치관의 대립을 표상하고 세대 간 극단화된 한국 사회 모습을 투영했다. 또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진상조사위원회’의 편향된 진상조사는 진실을 은폐하거나 일면만 부각하는 오늘날 권력 친화적 사회의 정련한 비유이기도 하다.
“저하, 연극은 시대의 거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본성을 거울에 비쳐 옳은 것은 옳은 대로, 어리석은 것은 어리석은 그대로 보여주면서 시대의 본질을 생생하게 나타내는 일입니다”라는 극 중 ‘연극배우’의 대사처럼, 국립극단 <햄릿>은 혼란한 이 시대를 무대 위에 기록하는 발자취로서, 새로운 시대의 관객과 마주할 준비를 마쳤다.
<햄릿>은 내달 7일부터 국립극단 홈페이지를 비롯한 예매 사이트에서 예매할 수 있다. 7월 19일부터 21일까지는 한국수어통역과 음성해설, 한글자막, 이동지원 등을 지원하는 접근성 회차를 운영한다. 7월 14일 공연 종료 후에는 정진새 각색가, 부새롬 연출가, 박상봉 무대디자이너, 이봉련 배우가 참석하는 예술가와의 대화가 예정되어 있다. 서울 공연 종료 후에는 세종예술의전당(8월 9일~10일), 대구 수성아트피아(8월 16일~17일)에서 지역공연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