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의 개념정립을 위한 노력은 멀게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서부터 가깝게는 1960-7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에서 논의가 펼쳐져왔다. 하지만 속시원하게 명료한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다만 문학이란 내용면에서 현실의 반영이자 재현이며 동시에 문학 그 자체가 역사의 산물이며 형식면에서는 창조적인 상상과 주관적인 감정을 통해 표현하는 언어예술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국내 무대에 초연된 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두 개의 뮤지컬이 있다. 하나는 의인화된 고양이들의 삶을 담은 T.S 엘리엇의 시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캣츠>이고 다른 하나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각색한 <노트르담 드 파리>이다. 두 작품은 모두 시대를 초월해 감동을 선사하는 고전문학을 원작으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고전문학이 주는 높은 격조와 원작의 탄탄한 지명도를 바탕으로 남녀노소가 모두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멜로디와 가사, 여기에 수준높은 안무까지 결합해 전세계에서 가장 흥행에 성공한 무대 장르로서의 뮤지컬의 대표 레파토리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두 작품의 기저에 녹아있는 원전의 향기를 맡아보는 건 어떨까?
<캣츠>, 고양이를 통해 본 인생
T.S. 엘리엇(본명: 토마스 스티언스 엘리엇, 1888~1965)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황무지』를 비롯한 많은 걸작들을 발표하며 영문학의 본고장인 영국 문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으며 시인, 비평가, 극작가로서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모더니즘 문학운동의 대표자이다. 그의 시집이자 <캣츠>의 원작인 『노련한 고양이에 관한 늙은 주머니쥐의 책(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 1939)』은 ‘고양이 이름짓기’로 시작해 ‘모건 고양이, 자기를 소개하다’까지 총 15편의 시로 이루어져있으며 뮤지컬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고양이들의 이름은 원작에 나와있다. 연출가 트레버 넌은 각각의 시들을 적절히 나열해 각기 다른 개성, 성격, 환경을 가진 재치있고 사랑스러운 고양이들이 자신들을 소개하며 벌이는 ‘묘생(猫生) 드라마’라는 기본 얼개를 짜고, 여기에 포함되지 못하는 별도의 이야기들-가령 ‘그로울 타이거의 마지막 접전’, ‘폴리클 개의 행진곡과 함께 하는 피크와 폴리클의 무시무시한 전쟁`-은 극중극으로 배치했으며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그 싯구들에 곡을 붙였다.
사실 대본, 작사, 작곡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뮤지컬 창작임에 비추어볼 때 기존 텍스트, 그것도 거의 오래전에 쓰여진 우화(寓話) 성격의 시에 맞춰 작곡을 하는 방식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하지만 원래 노랫말로 쓰여지기라도 한 것처럼 리듬감이 느껴지는 엘리엇의 시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트레버 넌은 원작 시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고양이들이 모두 3인칭 싯점으로 그려져 있음에 주목하고, 일부 주어와 목적어를 바꿈으로서 때로는 주인공이 직접화법으로 말하기도 하고 캐릭터간 대화도 가능하도록 하는 등의 방법으로 보다 다양하고도 역동적인 뮤지컬 가사로 각색해냈다. 여기에 화룡정점을 찍은 것은 바로 그리자벨라가 부르는 메인 곡 ‘메모리’이다. 원작 시집에서 등장하지 않지만 훗날 뮤지컬 창작 과정에서 엘리엇의 미망인으로부터 받은 미발표시에 포함되어 있었던 ‘그리자벨라’는 영어의 잿빛(grizzle)과 불어의 아름다운 여인(Belle)을 합성한 것으로 한때는 화려했지만 현재는 남루하고 덧없는 인생을 살면서 여전히 새로운 희망에의 끈을 놓지 않는 강인한 여주인공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가사는 T.S. 엘리엇의 다른 시집인 『프루프록과 그 외의 관찰』에 수록된 ‘전주곡’과 ‘바람부는 밤의 랩소디’를 트레버 넌이 직접 재가공하고 원작에는 없는 ‘메모리’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선택해 탄생했다. 이렇듯 <캣츠>는 엘리엇의 원작 시가 지닌 원초적이며 철학적인 깊이로 인해 그간의 뮤지컬에서 즐겨 다뤄온 인간의 희노애락, 자유, 사랑, 회한 등의 일상적인 주제가 훨씬 더 세련되고 격조있는 표현방식으로 무대에 구현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노트르담 드 파리>, 미래를 정조준하라
최근 우리나라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는 프랑스 뮤지컬의 붐을 일으킨 <노트르담 드 파리(Notre-Dame de Paris)>는 세계적인 대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원전이 가진 힘과 함께 고전의 현대화라는 명제에 대한 도발적인 해답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고전의 리얼리즘적인 재현 대신 철저하게 모던한 콘셉트에 입각한 재해석을 내렸다는 점이다. 무대위에서 두시간 반이라는 시간안에 담기에는 방대한 원작의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가다가는 자칫 거친 압축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연출가 질 마흐는 이를 노래로만 연결하는 콘서트 형식을 택했고 이 과정에서 다소 드러날 수 밖에 없는 드라마적인 여백을 무대 앞쪽에서 노래를 부르는 주연 배우들과 뒤편에서 역동적인 춤을 추는 앙상블 댄서들의 연희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시킴으로서 성공적으로 메울 수 있었다.
원작에서는 아름다운 집시 여인인 에스메랄다, 노트르담 성당의 종지기이자 곱추인 콰지모도, 그를 키운 프롤로 신부가 스토리의 중심에 서있다면 뮤지컬에서 음유시인 그랭구와르, 에스메랄다를 연모한 페뷔스의 비중도 높아져 다양한 서브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다. 또한 쉴새없이 이어지는 54곡의 음악에 인간의 욕망을 모던 댄스에 기반한 정교한 안무를 결합시켜 스펙터클을 구현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빅토르 위고는 원작 소설을 1831년에 발간했지만, 소설의 배경은 그로부터 150년후인 1482년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그는 당시 자신이 살고 있는 종교의 시대를 넘어 미래에는 바보들의 춤과 욕망이 넘실대며 서로를 파멸시키는 나약한 인간의 시대가 다가올 것임을 예견한 듯하다. 뮤지컬(1998년 파리 초연)에서 드러난 모던한 연출 역시 원작이 품고 있는 미래지향적인 진보성을 21세기에 맞게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멜로디보다 가사를 더 중시한다는 프랑스인 답게 극본/가사를 담당한 뤽 플라몽동이 써내려간 감미로운 노랫말은 원작 소설에서 이미 드라마틱하게 표현된 단어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이를 훨씬 감성적으로 치환시켰다. 절절한 표현의 시적인 노랫말을 듣고 있노라면 빅토르 위고의 원작은 유려한 명곡들을 한 무대에서 무리없이 이어지는 것을 돕기 위해서 말없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스토리텔링의 힘은 영원하다
지난해 9월 23일 <캣츠>의 오리지널 연출가인 트레버 넌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대한민국 콘텐츠페어 컨퍼런스에 기조 연설자로 초청받아 ‘웨스트엔드 뮤지컬과 공연의 글로벌 브랜드화 전략’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그의 말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오늘날과 같은 정보화 디지털 시대의 패러다임 속에서도 변함없는 가치는 바로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이다. 뮤지컬 무대화를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콘텐츠의 근본적인 힘은 고전문학에서부터 현재의 영화에 이르기까지 심금을 울리는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원초적인 창작 능력에 있으며, 이러한 아날로그의 힘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전세계 남녀노소들로부터 고루 사랑받는 보고(寶庫)이다. 앞으로도 뚝심과 장인 정신으로 무장하고 원작의 뛰어난 텍스트를 3차원 오감(五感)으로 빚어낸 또다른 명작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