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의 전범(典範)
수많은 공연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공연이 있다.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갖춘 공연이 물론 으뜸이다. 그런데 대개 이런 공연은 장르 자체를 대표하는 작품임을 한눈에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장르의 규칙에 수동적으로 꿰어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그 규칙의 모범을 자신 있게 제시한다고나 할까. 이럴 때 공연의 성취는 고스란히 장르의 미덕으로 이어진다. 작품이 축적되면서 장르의 규범은 더욱 튼실해지고, 한편으로는 그 튼실함을 해체하려는 도발이 시도되면서 또 다른 새로움이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형식은 진화하고 그 안에서 내용은 깊어진다. 이것이 전형이 창출되는 방식이고 또한 실험이 배태되는 원리이다. 이런 시도와 성과가 반복되어 쌓이면서 작품은 관객의 인정이라는 하나의 틀에서 벗어나 스스로 시간의 검증을 통과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대중적인 것이 됐든 고전적인 것이 됐든 이와 같은 작품의 자의식은 ‘예술적’일 수밖에 없다.
<저지보이스>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은, 이 작품이 주크박스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전범이 되기에 충분해보였기 때문이다. 브로드웨이에서 이미 흥행이 검증된 작품이지만 흥행이 완성도를 보장해주는 절대적 척도는 아님을 적잖이 경험해온 바, 이 작품이 보여주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은 관객으로서 반갑고 즐겁더라. 무엇보다도 그 깔끔함이 주크박스 형식이 일궈낼 수 있는 전형일 거라는 생각에 더 흥겨웠던 것 같다.
이 작품을 주크박스 뮤지컬의 대표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대중들에게 충분히 사랑받았던 그룹의 노래를 작품의 재료로 삼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건 주크박스의 일반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록큰롤 명예의 전당에 오를 만큼 전설적인 그룹 포시즌스의 노래가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는데, 그들이 불렀던 수많은 노래 중 서른 곡이 족히 넘는 노래가 작품 속의 넘버로 정말이지 쉬지 않고 흘러넘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의 음악이 품는 신선함은 배우들의 노래가 포시즌스를 그대로 연상시킨다는 데 있다. 설사 포시즌스를 모른다 하더라도 60년대 미국의 록그룹이 저랬겠구나, 충분히 상상케 할 만큼 배우들의 노래와 분위기는 뛰어나다. 정말 노래를 잘하고 정말 원본과 비슷하다. 촌스러운 듯 각 잡힌 안무까지.
두 번째 이유는 서사의 방식에 있다. 이 작품은 이야기의 재료를 엉뚱한 데서 찾지 않는다. 노래의 주인공인 포시즌스의 삶 자체가 극의 서사를 이룬다. 노래 주인들의 삶이 서사의 틀이 되니 그 수많은 노래들이 극 안에서 자기의 시공간을 어렵지 않게 찾아간다. 억지로 구겨 넣은 것 같은 노래가 단 한 곡도 없다니, 놀라워라. 서사와 노래는 서로에게 진정성을 부여하면서 상호작용한다. 이 둘의 행복한 어울림이 주는 쾌감은 크다. 그룹의 흥망성쇠를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누어 극의 흐름을 분할한 것이나, 각 계절마다 네 명의 멤버를 화자로 내세워 함께 활동한 그들의 삶을 각자의 관점으로 이야기한 설정도 이 극의 서사를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미덕은 이야기가 절대 비장해지지 않더라는 거다. 흥망성쇠라는, 감정의 높낮이를 격심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재료를 담담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이야기는 돋보인다. 결국 삶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는 무엇인지, 다 아는 것 같은데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을 때마다 곱씹게 되는 주제를 이 작품은 감정적으로 유치하지 않게 잘 담아낸다.
세 번째 이유는 공간 연출과 노래가 서로의 기능을 돕는다는 데 있다. 주크박스로서 이 작품의 충실한 면모는 무대 운용의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노래가 시간과 공간을 분절하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해내기 때문이다. 그 많은 노래들은 원곡을 훼손하지 않고도, 이야기를 끊거나 늦추기는커녕 극의 시공간을 유연하게 조절하는 타이머 역할을 한다. 이야기의 전개뿐 아니라 물리적인 장면 전환에서도 단 한 순간조차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그 역동성과 속도감이란. 노래가 무대 위 시공간의 흐름을 온전히 아우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노래는 모든 영역에서 리더십을 발휘한다.
재현의 원리에 충실한 <저지보이스>
이런 리더십이 중요한 이유는 주크박스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주크박스 뮤지컬에서 노래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원본’이라는 권위를 갖는다. 주크박스 뮤지컬은 이 원본 위에 세워지는 2차적 생산물이다. 그렇기에 주크박스 뮤지컬의 기본적인 원리는 재현이 될 수밖에 없다. 재현이란 원본을 전제로 삼는 예술적 표현의 방식인 바, 원본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고전적 원리이기도 하다. 이 원리에서는 무엇인가를 변형시키기보다는 원본과의 유사성, 즉 얼마나 원본에 닮도록 만들어내는가의 여부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매겨진다. 재현의 원리 안에서 작품을 평가하는 척도는 이미 주어져 있는 셈이다. 언제나 원본과의 비교를 통해서 작품의 완성도가 평가될 수밖에 없는 거다. 모두가 알고 있고 모두가 기억하는 노래, 그 절대적 권위로부터 달아나기는 어렵다. 주크박스 뮤지컬은 ‘주어진 것’을 재생하는 재현의 장르이기 때문이다.
<저지보이스>는 이런 재현의 원리에 충실하다. 포시즌스의 리드 보컬인 프랭키 밸리의 음색을 재현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에서 배우들의 노래는 원곡의 아우라를 그대로 재생한다. 극의 서사 또한 이들의 삶을 그대로 재현하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이러한 원리는 공간 연출에도 잘 드러나는데, 공연하는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 화면으로 처리해 무대 뒷면을 마치 브라운관처럼 설정하고 실제 당시 관객의 환호하는 화면을 나란히 배치하는 방식이 그렇다. 잠시나마 기록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특히 포시즌스가 대중 앞에 처음으로 인정받는 노래를 발표하는 장면에서 무대의 앞면과 뒷면을 뒤바꾼 공간 연출은 아주 흥미롭다. 관객은 그들의 공연을 지켜보는 청중이었다가 순식간에 그들의 무대 뒤편에 있는 관계자가 되어버린다. 그들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는 관객의 것이 되기도 하면서, 마치 그들이 일군 성공의 현장에 함께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저지보이스>는 노래와 서사와 연출의 모든 영역에서 원본을 훌륭히 반복하고 모사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저지보이스>는 고전적이다. 하지만 이런 면모는 성공한 주크박스 뮤지컬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맘마미아>를 생각해보라.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라 하더라도 작품 안에서 활용되는 노래는 원곡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더랬다. 재현은 여전히 유효한 고전의 원리인 셈이다. 특히 주크박스 뮤지컬에서는.
그렇다면 주크박스 뮤지컬의 형식에서는 새로움이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원본과 가장 닮음으로써만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역설적인 주체는 오로지 배우밖에 없을 거다. 대체불가능한 배우의 아우라가 재현의 반복을 차이의 생성으로 인식하게 해주는 거다. 실제로 <저지보이스>의 배우들의 모습과 노래를 보자면, 그들을 대신할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특히 프랭키! 물론 대역은 있다.^^).
또 그렇다면, 주크박스 뮤지컬 형식을 선택하면서 원본의 권위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망은 터무니없는 것일까. 속단할 수는 없다. 장르의 기본적인 존재 방식을 건드린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험의 장르가 되기에 주크박스 뮤지컬은 아직 축적해야 할 재현의 창작물이 많이 필요하다. 변화구보다는 직구가, 전위적이기보다는 먼저 고전적일 필요가 있는 거다. <저지보이스>와 <맘마미아>의 성공과 생존이 말해주는 게 바로 그런 사실 아닐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6호 2014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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