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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논란의 폭풍 속에 휩싸인 <더 데빌>

글 | kelly | 사진제공 | 알앤디웍스 2014-09-17 3,182


공연이 시작되고 꼬박 3주가 넘었지만 여전히 호불호를 이야기 하는 작품이라면 분명히 문제작이다. 맞다, <더 데빌>.
작품 제목처럼 악마같이 집요하게 관객과 평단과 창작자들을 괴롭히는 작품이다. 모두 다른 각도에서. 혹자는 관객에게 다가가지 않는 거리감이 아쉽다 하고, 혹자는 한국 뮤지컬 한 세기를 통틀어 거론될 만한 작품이라고도 한다. 미묘하다. 칭찬인 듯 칭찬 아닌 칭찬 같은 소감들 속에 어떤 이들은 음악이 좋다고, 어떤 이들은 그저 배우가 좋아서, 또 어떤 이들은 취향에 딱 맞는 작품을 만났다고 하며 반복관람이 시작된 것 같다.
 
파우스트를 오마주하여 거기서 캐릭터를 가져오고 가사와 대사의 많은 부분을 재창조 해냈지만, <더 데빌>은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 있다. 파우스트의 오마주일 뿐, 파우스트의 재해석이나 재구성이 아니고 알고 있던 파우스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파우스트를 알고 오면 좀 더 쉬울 수 있겠지만 모른다 해도 작품 이해에 어려움은 없다. 오히려 기존 작품들을 보아오던 관극 습관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상황이다. 주제에의 집중을 위한 사건묘사의 최소화, 슬라이드 방식의 씬 전개, 등장인물의 심리를 따라가는 스토리, 사건설명이 일체 자제된 노래들, 가사의 추상성과 대비되는 이미지의 구체성, 스토리텔러로서의 코러스, 종교음악과 록을 섞은 음악, 콘서트 같은 조명 등등, 그 모든 것들이 몰랐던 것은 아닌데, 몰랐던 방식으로 조합되었고, 그 파격의 충격파장이 큰 것 같다. 
 
 

주제에의 집중


 
<더 데빌>에는 많은 키워드가 존재한다. 신,악마, 구원, 사랑, 희생, 용서.. 이 모든 것들이 존 파우스트의 선택으로 인해 생성된다. 선택, 이 작품을 꿰뚫고 있는 큰 줄기이다. 명확한 주제를 위해 '선택'한 방식은 선택의 결과를 바로 관객 앞에 들이대고 보여주는 것, 사건이 일어나고 해결되는 에피소드를 통해 줄거리가 이어지고 등장인물의 성격과 극의 분위기가 결정되는 작품들과 다른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왜 쉬운 에피소드전개를 버리고 굳이 품이 많이 드는 상황, 심리 묘사를 선택했을까?
 
작품이 선택한 주제와 주제를 가장 잘 부각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창작자의 몫이다. 편하게 관객과 본인에 익숙한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고, 힘들지만 새로운 방식, 관습적이지 않은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 낼 수도 있다. 새로운 길을 갈 때는 관객의 이해가 낮을 것이라는 리스크를 각오해야 한다. 이 작품은 리스크를 선택했다. 편안한 길보다 어려운 길을 찾아가는 연출의 이전 선택들에 맞닿아 있다. 
 
선택이라는 주제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존과 그레첸이 어떻게 변화하고 바뀌게 되는지가 더 중요하지, 무슨 사건이 일어났느냐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그래서 존의 선택의 결과를 집중적으로 보여주며, 극중에서 X의 제안을 받고 악을 선택한 후 그와 그를 둘러싼 인생이 얼마나 어둡고 참담하며 고통스럽게 바뀌는지를 불편할 만큼 생생하게 민낯으로 내놓는다. 존이 X의 제안을 받아 들이는 부분이 존의 메인 넘버인 가디언 에인절인데, 노래 가사 속에 제안을 받아들여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다음 씬에서 존은 이미 악을 받아들인 존재로 나온다. 이렇듯 <더 데빌>에서 사건은 매우 잠깐, 순식간에 일어나고, 그 사건으로 인해 초래된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에 그 모든 상황을 초래한 결정적 지점, 사건(point of no return)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가면 작품을 다 보고도 무엇을 본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플롯이 없다는 지독한 평을 듣기도 한다. 없다고 할 수는 없고, 아주 아주 단순한 플롯을 가진 작품이다. 그렇게 플롯을 단순화 한 이유는 앞서 말 했듯, 주제를 명확히 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건이 아닌 상태를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악의 선택-고통스러운 삶-자신의 희생을 통한 복구라는 단순한 플롯 속에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변질시킬 만큼 중요한 선택이란 있을까, 죽음을 불사하면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인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변화된 상태(being)를 보여주기 위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doing)를 최소한으로 자제하다 보니 장면들은 슬라이드 필름 영사하듯 제시된다. 큼직한 에피소드와 사건들의 전개로 스토리를 짐작해가던 기존의 이해방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특히 다음 장면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X의 제안을 받아들인 뒤 존은 놀랄 만큼 냉랭한 태도로 그레첸을 대하지만, 또 어느 순간은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레첸의 악몽과 X인지 존인지에 의한 폭행의 경우도 각 씬들이 앞과 뒤가 절대 바뀔 수 없는 순서의 사슬에 매어 있지 않고, 그 역시 슬라이드의 한 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X는 사악했다가 신성했다가 하는 양극단을 오가고, 존은 그레첸을 몰아 부치며, 그레첸은 신을 찾고 악마를 두려워 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그 와중에 부르는 형이상학적 노래들은 존과 그레첸의 심리를 따라 가야 납득이 되고, 그들의 관계를 투영해 작품이 던지는 질문에 함께 고민을 할 수 있다.  관객들이 지금까지 작품을 보아왔던 기존 상식으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그 사건이 해결되고 스토리가 봉합되기를 바라고 있는데, 뭐 하나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 없이 그레첸은 결국 자살까지 하니 대체 뭘 보러 앉아있는가 싶은 생각이 들 수밖에.  결국 왜 그렇게 힘든 장면들을 보고, 어려운 가사를 들어가며 앉아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공감대를 극 초반에 얻지 못하고 줄곧 2막까지 달려가 버린 것이 이 작품의 오프닝 후 쏟아진 수많은 악평과 질타의 근본적 원인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이후 조금씩 추가된 대사를 통해 극적 전환점들이나 중요 포인트를 관객에게 비교적 쉽게 제시하고 있어 초반의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낯선 구조임은 분명하다.
 
주제를 포커싱하기 위해 사건 대신 상황과 심리에 날을 세우는 것으로 작품 전반을 채운 것은 스토리에 유달리 집착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과감하고 새롭다. 어떤 공연예술이라도 스토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 현실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는 뮤지컬 문법을 깼다는 말은 일견 맞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위해서는 아마 모험 이상의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고 군더더기를 다 떨쳐내는 작가주의로의 전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밀도높은 컨텍스트를 위한 어려운 장치들



<더 데빌>의 씬들은 슬라이드 형식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씬이 넘어갈 때나 새로운 씬이 들어올 때 이해를 위해서는 컨텍스트가 필수적이다. 어느 지점에서부터 봐도 아, 누가 착한 사람, 주인공, 누가 죽어야 할 캐릭터가 왠만큼 구분이 가는 사건 중심 작품에서는 컨텍스트가 무의미하지는 않아도 가장 중요하지는 않다. 그런데 상황, 심리를 이해해야 한다면, 컨텍스트 없이는 지금 보는 것이 아까와 비슷한 씬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데 앞과 딱히 연결되는 것 같지도 않지만, 아니라 할 수도 없는 곤혹감을 느낄 수 있다. 특히나 그레첸이 고통받는 씬들은 잘 살펴보면 점층되고 있으나, 대충 볼 때는 선후를 바꿀 수 있어 보이기도 해서 더더욱 이건 또 뭐야? 하는 의문이 생길 소지가 크다.
 
<더 데빌>은 기본적으로 대사가 거의 없는 송스루 형식의 작품이라서 가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대사와 가사는 모호한 은유이고 암시, 추상적이고 심지어 문어적이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은 월스트리트와 M&A인데 신과 악마를 말하고, 나의 신전이 무너지고 지옥의 씨앗 운운한다. 오버스럽다고들 하는 연극적도 아니고 문어적인 가사와 대사는 최근의 뮤지컬 대사와 가사가 상당히 구어화되어 가는 경향에 반하며, 아주 낯설게 들린다. 즉, 듣고도 무엇을 들었는지 뇌까지 전기자극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다. 설령 전해 진다 해도 내가 듣고 있는 것과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정면충돌하는 경험을 한다. 눈 앞에서 울고, 소리지르고, 뛰는 주인공들의 상황을 그려내는 가사치고는 지독하게 형이상학적이다. 파우스트를 제대로 오마주한 원죄다. 
 
보통 작품은 눈앞에 일어나는 일, 일어난 일, 일어날 일에 대해 직접적인 표현으로 노래를 한다. 때로는 다소 추상적이기도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씬에 노래를 붙여보면 백퍼센트 이해가 간다. 이유는 사건이 존재했고, 사건에 대사와 가사가 종속되기 때문이다. 심리를 노래한다 해도, 사건으로 인한 심리, 마음의 변화나 고통 등을 노래하는데, 이 작품은 상황과 심리 자체를 보여주므로 사건에 종속되는 가사는 없고, 그 앞 씬에서 느낀 캐릭터들의 심리를 이해하고 가지 않으면 다음 씬의 상황이 애매모호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더 데빌>의 가사의 은유와 추상이 학위논문 소지자만이 이해할 수 있을 수준의 어려운 것은 아니다. 비둘기를 보고 평화를 떠올릴 수 있는 수준의 상징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80프로는 무난히 따라가고, 파우스트나 성경에 조금 친했다면 의미를 백프로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럼에도 어려웠다면 사건에 연결해 텍스트를 듣고자 하는 습관에 반하는 작품 전개의 새로움이 이유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 작품은 가사와 대사를 씹어봐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하는 작품이다. 공연 오픈 전에 가사가 공개된 것은 아마 그런 맥락에서 미리 가사를 알고 오라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되지만, 문제는 관객이 그렇게 부지런하지도 않고-그래야 할 의무도 없으며- 애정백점으로 작품을 보러 가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한 것.  
 
또 한가지 기술적인 부분이지만 중요한 포인트는 컨텍스트를 만들려면 일단 대사든 가사든 들려서 무슨 내용이 진행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의 긴장감 높은 분위기를 만드는데 롹이 주요하게 쓰였고, 감정의 텐션을 제대로 살리고 있지만, 그로 인해 컨텍스트를 만들어야 할 가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은 큰 문제다.
록뮤지컬에 가사를 논하는 것이 에러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록콘서트에 새로운 노래 들으러 가는 사람들은 없다. 거의 아는 노래를 감상하러 간다. 그런데 <더 데빌>을 창작 초연 작품이다. 록뮤지컬이 가져야 할 록필의 충만함을 초연에서는, 적어도 초반에 작품이 안착할 몆주 동안은 잠시 내려 놓고 가사를 들리게 해 줬다면 좋았을 법 했다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그도 저도 아니었다면, 아예 공연장에 자막을 다는 과감함까지 감수했다면 어땠을까?
 


진리가 너희를 구원하리라
 
 

이 작품을 보고 나온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인 뮤지컬과 다르다고 느낀다. 콘서트 보고 나왔다고도 한다. 
날카로운 전자 바이얼린, 뭉툭하게 잘라내는 기타와 심장을 울리는 드럼의 강한 록 사운드 사이에서 수시로 들려오는 종교음악 같은 멜로디로 울다 웃다 진을 빼고, 비트 강한 팝적인 넘버가 끼어 쇼 같이 번쩍이는 조명 아래 질주하던 작품이 갑자기 산뜻하게 시간이 지나갔다는 대사 한 마디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수습이 되며 첫 장면으로 돌아가는 데서 상당한 인지적 괴리를 느끼는 듯 하다. 게다가 두시간의 힘든 상황을 거친 존과 그레첸이 커튼콜에서는 흰 옷을 입은 자상해 보이는(!) X와 함께 행복한 얼굴로 생은 아름다워! 라고 노래하는 것을 보고 난 무엇을 본 건가? 하고 의문을 갖게 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더 데빌>은 해피엔딩이기도 하고, 엔딩을 유보한 것이기도 하다. 존과 그레첸은 새로운 시작을 한다고 볼 수도 있고, 그들에게 시련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 수 도 있다.  
아무려나 진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여기 서 있는 존과 그레첸의 삶은 여전히 선택을 할 수 있고,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아름다운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걸 가장 즐겁게 무대와 객석이 즐길 수 있는 형태는 단연 콘서트다. 두시간의 시련을 함께 해 온 관객과 배우가 하나가 되어 해피엔딩을 축하할 수도 있고, 지나간 괴로운 일 자체가 없었던 거였다며 좋아할 수 도 있다. 어느 쪽이든 지금 아무런 고난 없이 이 자리에서 함께 한다는 사실이 즐거운 것임을 나누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끝나야만 해! 라는 어떤 정해진 룰을 마음 속에 정해 놓고 작품을 보는 것보다는 펼쳐지는 것을 느끼고 즐기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한다. 비극인줄 알았더니 해피엔딩이라니, 이런 일관성 없는 전개가 있나 라고 비난하기 전에 무엇을 보고 왔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작품은 모든 불협화음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가치가 있을까 반문해 본다면 내 대답은 당연히 예스이다. 가장 단순한 플롯 속에서 가장 많은, 심오한 질문을 던지고, 최소의 등장인물들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인간의 면면을 보며 생각하게 해 주는 의미가 크다. 재미만 있는 작품은 그 재미의 유효기간이 다하면 사그라진다. 결국 인간의 삶에 대해 만고불변의 진리로 다가서는 진지함이 깔려 있는 작품이라야 새로운 시도라는 리스크를 돌파구로 삼아 살아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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