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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뮤지컬 <더 데빌> 괴작과 걸작 사이…충돌이 빚어낸 거대한 소용돌이

글 | piriri | 사진제공 | 알앤디웍스 2014-09-03 6,226


십대 시절 동네 단골 비디오 가게가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가끔씩 불법 복제 비디오를 추천해주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한국에 공식적으로 들어오지 못했던 영화들이었다. 일본영화, 미국 B급 영화, 남미 영화 등 종류도 다양했는데, 그 중 가장 난감했던 것은 남미의 영화들이었다. 특히 조도로프스키의 <엘토포>는 고통을 넘어 혐오와 분노를 일으키기도 했다. 한참 뒤에 읽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마르케스의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것을 단 한 글자도 이해할 수 없었다. 현실을 환상처럼, 환상을 현실처럼 표현함으로써 리얼리즘을 더 극대화시킨다는 말장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십 대 시절 그에 못지않은 쇼크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오태석 선생과 일련의 한국 연극들이었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고, 현재와 과거가 뒤섞이는 가운데 배우들이 뿜어내는 거대한 에너지가 내게 버거웠다. 왜 돈을 주고 시간 내서 이것을 봐야 하는지 회의스러웠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 진의를 이해(?)한 뒤 존경과 감탄을 표하게 되었지만 가까이 두고 즐겨 찾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나는 그것들을 잊고 살았다. 얼마 전 뮤지컬 <더 데빌>을 보면서 나는 기억의 저편에서 그것들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그리고 이 기괴한(?) 작품이 젖줄을 대고 뼈와 살을 만들어낸 것들에 대해서 누군가와 이야기 하고 싶은 욕망이 들었다. 따라서 이글은 평론이나 리뷰보다는 욕망의 배설에 가깝다. 그러니 나는 이 글이 내가 원하는 대화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되기를 바란다. 혹시 제목에 낚여 잡문에 눈길을 주신 분이 있다면 서둘러 덮길 바란다. 몹쓸 것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뮤지컬 <더 데빌>은 파우스트에 대한 오마주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작품의 특정 장면, 특정 대사를 인용함으로써 존경을 표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대놓고 오마주라고 한다. 그러니 이 작품을 감상하는 첫 번째 관문은 어떻게 오마주 했는지, 그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일 것 같다. 그러나 파우스트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읽을 당시에도 지겨워 죽을 것 같았는데 <더 데빌>을 보기 위해 다시 찾아 읽긴 힘들다. 따라서 기억이 이끌어주는 대로 적을 수밖에 없다. 틀린 점이 있다면 누군가 정정해주시기 바란다.




파우스트는 유럽이 종교의 가장 타락한 영향력 하에 놓여 있던 중세를 지나서 과학과 산업의 발달로 새로운 이성에 눈뜬 시대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종교가 사회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였다. 종교의 폐해를 알면서도 종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신의 존재를 회의하면서도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간 이성의 한계와 가능성을 논하는 시대이다. 따라서 파우스트는 그 어떤 것도 섣부른 결론을 내려 하지 않고, 온전히 이 모든 것을 탐구하는 것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따라서 파우스트의 오마주라는 것은 적어도 나에겐 이 논리의 틀 안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개인적 한계를 고백한다. 

<더 데빌>은 원작과 달리 1990년대 뉴욕 월스트리트로 시공간을 옮겼다. 파우스트 중에서 파우스트와 그레첸의 사랑에 대해서만 발췌하여 각색했다. 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데 두 등장인물 존 파우스트와 그레첸은 신의 존재를 믿고, 그에 의지하려고 한다. 이것은 종교(여기서는 기독교)에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일 수도 있지만 절대적 존재, 절대적 가치 등에 대한 믿음 등 중의적 장치이기도 하다. 또한 인간은 수 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나약하고, 절대적인 어떤 존재에 의존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더 데빌>은 대사와 중요한 노래들의 가사들을 원작 파우스트에서 거의 발췌하거나 기독교 상징들을 차용하는 듯 하지만 결론적으로 종교에 대한 맹목성을 경계하는 입장을 명확히 한다. 1막 마지막 ‘그이름’은 파우스트에서 100프로 인용한 가사로써 괴테의 입을 빌어 종교를 논한다. 당신이 불러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더 데빌>에서 기독교는 하나의 배경에 불과할 뿐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이것은 2막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다만 이를 작품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관객의 이해력과 취향을 테스트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데빌>의 2막은 종교가 주는 긍정적인 측면을 남겨 놓는다. 그것은 위로이다. 힘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 주는 것이 종교의 가장 큰 가치임을 2막에서 보여준다. ‘송오브송즈’, ‘꽃잎’ 같은 노래가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작품은 결국 현실의 모든 것은 신 또는 그 누구도 대신 해결해주지 않으며, 인간 스스로 선택하고 해결할 문제임을 말한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리고 인생이 비록 지옥의 불구덩이에 있더라도 견디라고, 살아내라고. 인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여 <더 데빌>은 자신의 오마주한 파우스트를 긍정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입장에서 오마주한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것들이다. 파우스트에 영감을 받은 많은 작품들이 지나 왔던 길을 무난히 답습한다고 해도 무방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을 풀어나가는 방법 즉 공연예술, 뮤지컬이라는 장르에서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가이다. 즉 <더 데빌>은 내용적 기발함이 아닌 장르적 특성에 맞는 형식미로 기존의 파우스트 오마주 작품들과 자신을 차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대사와 가사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18세기 서양의 그것을 차용하고 있다고 이미 말했다. 이 불일치가 주는 미묘한 느낌이 있다. 종교적 배경 때문에 오멘이나 엑소시스트 같은 작품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이런 오해는 오마주가 빚은 비극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의 발단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드라마를 한국적인 씻김굿으로 표현함으로써 발생하고 있다. <더 데빌>에는 한국의 연극 또는 공연예술을 토착적이고 독특한 것(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으로 만들어낸 오태석과 일련의 공연예술가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현실을 환상처럼, 환상을 현실처럼 어제를 오늘처럼, 오늘을 내일처럼 표현하면서 시공간을 해체하고 새로운 미학을 창출하였던 일련의 한국 연극들은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과는 다르지만 또 같았다. 물론 서구의 명작을 한국적 무대 언어로 표현한 작품들은 그 동안 꽤 많았다. 하지만 기존의 작품들과 다르게 <더 데빌>이 흥미로웠던 것은 뮤지컬이기 때문이고, 뮤지컬이라는 형식 안에서 이 두 가지가 빚어내는 이중 삼중의 충돌이었다. 그 충돌은 형식 또는 양식의 충돌이고, 그 충돌은 때론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

<더 데빌>의 드라마는 액자형 구조 안에서 움직인다. 따라서 드라마 안에서 X의 역할이 있지만, <더 데빌>이라는 뮤지컬 안에서 그는 사회자의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그동안 사회자 또는 내레이션이 나오는 뮤지컬들이 있었다. <록키호러쇼>, <시카고>, <에비타>,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등. <지저스>의 경우에는 맨 마지막 한 곡으로 그것을 갈무리하기 때문에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어쨌든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액자형 구조로 드라마를 구성하고, 그 드라마가 아무리 심각하고, 황당하고, 비극적이라 할지라도 여기는 극장이고, 당신은 관객이며, 우리는 지금 쇼를 하고 있다고 대놓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더 데빌>의 드라마 안에서 X는 신도 되고, 악마도 되고, 파우스트와 계약하는 악덕 기업주도 된다. 그러나 드라마 밖에서 그는 파우스트와 그레첸을 관찰하고,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노래로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X가 연기를 하면서 뮤지션과 교감하고, 코러스들과 댓거리를 주고받는 것은 애드리브가 아닌 것이다. 또한 1막 ‘그이름’, 2막 ‘피와살’은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며, 형식적으로 사회자가 등장하는 쇼뮤지컬의 형식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따라서 드라마의 전개에 따라서 이 노래들을 감상할 경우에는 뜬금없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작품 내적인 갈등이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X가 드라마에 개입할 때는 신, 악마 또는 파우스트와 그레첸의 내면 같은 추상적 존재일 때가 많다. 이럴 경우 작가는 관객이 정말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반면 쇼뮤지컬 형식으로 명확히 할 경우 X를 대놓고 사회자라고 알려주는 것이 친절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너무 싼 티가 날 수도 있고, 신비감이 사라져서 작품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작가는 X가 사회자라는 것에 대한 다양한 단서를 뿌려 놓는 것으로 작품을 갈무리 한다. <더 데빌>의 최대 수수께끼는 아마도 X가 사회자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작품 안에서 X의 이중적인 측면은 이질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존재의 느낌을 강조하는 배우에게 관객은 신과 악마 그리고 인간의 내면을 볼 것이고, 작품의 쇼적 성격을 잘 표현하는 배우라면 광대를 볼 것이다. 물론 연출은 배우가 이 두 가지 미션을 다 수행하여 관객들에게 더 복합적인 캐릭터로 보이길 원했을 것이다. 어쨌든 의도는 분명하고 그것에 가장 근접한 것은 한지상이 연기하는 X일 것이다. 



<더 데빌>은 3인극이다. 그러나 각각의 인물들은 드라마 못지 않게 표현과 형식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의 떠받치고 있다. 존 파우스트는 고전적 스토리 전개와 표현을 담당하고 있다. 이 배역은 매우 전형적이다. 연출은 그가 내면과 현실을 동시에 또는 선과 악한 면을 동시에 보여지게끔 함으로 연기의 입체감과 매력을 만들어 내려고 한 것 같다. 그리고 배우는 1초 단위로 그것을 바꾸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 뮤지컬 안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식을 지키면서 동시에 다른 배우들의 광기와 에너지를 묵묵히 견뎌내며 드라마를 지켜야 하는 임무를 부여 받고 있다. 따라서 얼핏 보기에 가장 밋밋할 수 있는 역할이지만 존 파우스트에 의해서 이 작품은 균형감을 획득하게 된다. 상상해보시라 한 배우는 드라마를 이끌어 가고, 한 배우는 씻김굿을 하며, 한 배우는 쇼를 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참여하고 있는 배우들이 자신들이 맡은 역할(형식적인 면까지도)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인터뷰는 이를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그레첸 역을 맡은 두 여배우가 매우 힘들지만 공연이 끝난 뒤 힐링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녀들은 사랑과 희생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매일 매일 씻김굿을 하고 다시 태어나길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족처럼 덧붙이자면 차지연은 노래뿐만 아니라 역대 한국연극이 낳은 불세출의 연기파 여배우들의 재림이라고 본다.

이렇듯 이 작품은 모든 측면에서 전형성을 거부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을 충돌시킴으로써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문화적 충돌도 있고, 형식적 충돌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단 3인의 배우들에 의해 완성해나가고 있는 점에서 박수 받을 만하다.  3인의 배우들의 에너지가 최고점에 이르기까지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부풀어 오르다 풍선처럼 터지는 순간 거대한 장관을 연출하곤 한다. 마치 단순한 원자의 결합이 핵폭탄이 되는 것처럼. 그러나 배우들의 힘이 균형을 잃을 때 보는 사람은 혼란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또한 이렇게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충돌하는 것 자체가 낯설고 불편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허나 이 낯선 작품은 한국 창작뮤지컬의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줄 것이라 예상된다.

음악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할 것이 없다. 우디박과 이지혜의 다른 취향, 다른 선택은 이 작품의 뼈와 살이며 동시에 모든 불협화음의 출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 창작뮤지컬 중에서 이토록 매혹적이고 완성도 높은 음악을 나는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이 작품이 관객의 사랑으로 재공연 된다면 그 힘의 원천은 음악일 것이다. 또한 이 음악은 작품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이미 제시하고 있다. 중극장에 머물기엔 아까운 곡들이다. 작품이 수정된다면 각각의 곡들을 어떻게 무대에서 형상화시킬 것인가 이며, 동시에 설득력을 확보할 것인가가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더데빌>이 에비타와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더데빌>에 대한 나의 호기심과 관찰을 이야기했다. 논거가 부족한 면도 있고, 창작진의 생각을 곡해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그런 것들을 나누고자 함이라 나의 무식이 부끄럽진 않다. 다만 더 정교하고 더 풍부한 내용을 누군가 나에게 돌려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조악한 나의 글은 이 기괴한 작품이 끝내 살아 남아 한국 뮤지컬의 걸작으로 남아주길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 때문임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추신 
<더데빌>은 매 장면마다 배우들이 유명한 회화들을 재현하고 있다. 이것 역시 의도된 오마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찾아보는 것은 꽤 쏠쏠한 재미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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