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다닐 때였어. 부모님이 사준 판다 인형을 유치원에 가져갔어. 그리고 선생님한테 보여줬는데, “정말 예쁘다”하면서 웃어줬어. 그 선생님은 분명히 말했거든. “다음에 또 보여줘”, “다음에 또 보여줘”, 그렇게 말이야. …난 정말 기분이 좋았어. 그래서 다음날도 가져가서 보여 줬지. 선생님은 또 예쁘다고 했어. 그래서 그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가져갔어, 그 판다 말이야. 거의 한 달 동안 매일매일 가져가서 보여 줬지. 선생님은 “이제 됐어”라고 했지만 그래도 얼굴이 웃고 있어서 나는 계속 가져가서 보여줬지. 그런데 어느 날, 그 선생님이 고함 쳤어. 갑자기, 정말 갑자기 고함 친 거야. “이제 가져오지 말라고 했잖아!”
-연극 <억울한 여자> 中
아, 왠지 억울해, 씨….
-연극 <억울한 여자>
작년, 평균 연령 30대 중반의 남녀가 뒤섞인 술자리에서의 일이다.
“김짱은 언제 결혼할 거예요?”
“아니…. 뭐…. 딱히….”
시큰둥한 대답에 얼큰하게 취한 누군가가 우스갯소리로 되물었다.
“김짱! 고자 아냐?”
“고잔지 아닌지는 결혼해 보면 알겠죠.”
순간 정적. 침묵을 깬 건 날 제법 잘 안다고 자칭하는 여자였다. 근데 이건 뭥미.
“김짱, 지금 순진한 척하는 거라니까요.”
정말이지 나이를 헛먹은 난 그때까지 고자의 뜻을 몰랐다. 아니, 무지의 소치라기보다 고자의 정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일이 없었다는 게 옳은 표현일 터. 그저 불임의 동의어라고만 여겨왔던 것이다. 하지만 한 남자의 순결한 ‘무지’는 ‘계산된 행동’으로 타락해버렸다. 날 제법 잘 안다고 자칭한 여자의 한 마디로 인해. 빌어먹을!
누구나 이런 억울한 사연 하나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니 사소한 억울함은 매일 쌓이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억울함을 다 합해도 ‘유코’의 억울함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억울한 여자>의 가사하라 유코에 비하면. 지나가는 칭찬의 말을 순진하게 믿고 매일 유치원에 판다인형을 가져갔던 어린 시절의 일화는 순탄치 않을 인생유전의 예고편일 뿐이다. 그녀의 친구들로부터는 공주병, 거짓말쟁이 취급당하고, 급기야 사랑했던 교사로부터 스토커로 낙인 찍혀 퇴학까지 당하게 되는 유코의 사십 평생은 오해와의 전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 왠지 억울해, 씨….”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닐 만도 하다.
살아오는 내내 유코는 주변사람들로부터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증, 편집증, 의부증 등등의 합병증을, 그것도 중증으로 앓고 있는 환자로 취급받았다. 심지어 그녀는 가족들로부터 연이 끊기고, 네 명의 남편들로부터도 버림받았다. 지금 막 이혼한 남편은 그림 작가인 다카다 사토루. 유코를 전적으로 이해하고, 전심으로 위로해 줄 것 같던 네 번째 남편 다카다마저 결국 유코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잘못했다 치더라도, 네 차례나 결혼에 실패하는 건 너무 억울한 운명 아닌가? 불륜도 저지르지 않고 성실의 의무를 이행했는데, 남편에게 비밀 없이 모든 일을 낱낱이 고백하는 신의의 의무도 저버린 적 없는데 말이다. 사랑 받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는데 번번이 결혼이 수포로 돌아가니 정말 억울한 여자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이 파경에 이를 즈음, 나의 영혼은 유코에서 빠져나와 다카다에게 빙의한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 관객이 특이한 유코보다는 평범한 다카다에게 감정이입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카다에게도 항변의 기회를 마련해 줘야 한다. 유코도 억울하고 서럽겠지만, 억울함에 관한한 다카다도 유코 못지않다. 관계 맺기에 서툰 유코 때문에 피해 입는 사람은 바로 다카다니까. 유코로 인해 다카다의 모든 인간관계는 파산직전에 이른다. 유코의 안중에 그런 일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다카다에게 빙의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유코의 평생소원은 오직 평범하게 사는 것. 유코는 평범해지려 노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에게 이해받고, 사랑받길 간절히 희구한다. 하지만 타인에게 이해받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유코가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하긴 했을까? 오해와의 전쟁을 치르며 유코는 자신을 이해시키기에만 급급했던 것은 아닐까? 유코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비록 다카다는 유코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유코를 이해하려 노력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유코만 억울한 여자라도 감싸고돈다면 통탄할 노릇 아닌가. 그래서 나는 다카다가 가엾다. 안쓰럽다. 유코는 ‘억울한 여자’라고 작가로부터 작품제목도 하사받고 관객의 위로도 받지만, 다카다는 유코에게 주연도 뺐기도 관객들로부터 큰 위로도 못 받지 않는가. 정작 제목은 ‘억울한 남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아가 우리 모두 억울한 인생 아니던가. 아무리 그녀의 생이 억울했다 하더라도.
이쯤에서 용두사미 서둘러 글을 마치려는데, 뜬금없이 정신을 잠식하는 이 느낌의 정체는 무엇인가? 갑자기 왜 이렇게 억울하지? <억울한 여자>를 보고 나서도, 나를 ‘순진한 척’하는 사람으로 몰아세웠던 그 여자의 빌어먹을 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역시 내 그릇이 작기 때문인가? 그러나 억울한 내가, 나를 억울하게 만든 장본인의 사정까지 헤아리는 건 정말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나아가 이 글을 보는 당신마저 그녀처럼 ‘김짱, 순진한 척하고 있는 거 아냐’라며 의심하면 어쩌지? 아, 왠지 억울해, 씨. 너무 너무 억울해.
*김짱 : 영화 <배트맨>을 보며 고담의 다크나이트를 꿈꾸나 소파의 암모나이트나 되지 않으면 다행. 소파에서 자고일어나 소파에서 빈둥거리며 일상다반사 소파에서 해결하려 하는 김짱은 오늘도 극장가길 포기하고 소파에 화석처럼 묻혀 대본 읽기로 자위 중이다.
공연정보
연극 <억울한 여자> (9.4-9.14,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
작: 쓰시다 히데오, 번역: 이시카와 쥬리, 연출: 박혜선
출연: 이지하 박윤희 한성식 이선주 김문식 조영규 김주령 이지영 김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