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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OVER STORY] 류정한, 깊게 뿌리내린 나무 한 그루 [No.199]

글 |박병성 2020-05-04 4,847

류정한
깊게 뿌리내린 나무 한 그루 


배우 류정한을 생각하면 들판에 곧게 솟은 한 그루의 나무 이미지가 떠오른다. 오랜 시간 묵묵히 한자리를 지키며 둥치를 키워가는 나무처럼 류정한은 본격적으로 뮤지컬에 전념한 2001년 <오페라의 유령>부터 지금까지 뮤지컬계를 지켜오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 왔다. 바람이 불고 눈비가 와도 큰 기복 없이 20여 년 동안 정상의 자리에 그가 서 있었다. 



뮤지컬에 뿌리내리다
류정한의 뮤지컬 데뷔작은 1997년 삼성영상사업단이 올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였다. 해외 스태프들이 직접 오디션을 주관했던 이 프로덕션에서 뮤지컬 경험이 전무한 그가 무려 400대 1의 경쟁을 뚫고 토니 역을 따냈다. 서울대 성악과 출신이 뮤지컬에 참여한다는 이유만으로 이슈가 되던 때였다. 가십 같은 관심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류정한의 토니는 충분히 주목할 만했다. 뮤지컬 데뷔 무대였지만 류정한만큼 레너드 번스타인의 음악을 작곡가의 의도대로 충실히 실연한 배우는 없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신인상을 받는다. 

뮤지컬 무대에 선 이후 연기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세 편의 연극 무대를 경험했다. 이때만 해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배우로 생각하진 않았다고 한다. 그를 뮤지컬에 뿌리내리게 한 작품은 <오페라의 유령>이다. 2001년 한국 공연계의 지각 변동을 일으킨 이 작품에서 그는 프리마돈나 크리스틴을 지키는 믿음직한 귀족 라울 역에 캐스팅됐다. 젠틀하고 부드러운 외모와 목소리는 누가 봐도 라울 그 자체였다. 7개월간 라울로 무대에 선 후 지금까지 매해 두세 편의 뮤지컬에 참여하고 있다.

차세대 뮤지컬 스타로서 류정한의 이름을 각인시킨 것은 2004년 조승우와 더블 캐스트로 출연했던 <지킬 앤 하이드>였다. 귀족적인 이미지를 지닌 그가 올바른 도덕성을 지닌 지킬 박사를 잘 해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충동적이고 악한 기운을 내뿜는 하이드마저 훌륭히 해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귀족적인 이미지는 지킬뿐만 아니라 하이드로의 변신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상반된 캐릭터로의 변신 폭이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특히 부드러운 저음에서 날카로운 고음으로 치닫는 특유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학습된 도덕이나 교양의 틀을 찢고 날것의 본능을 드러내는 하이드와 잘 어울렸다. 




새로움을 향한 주저 없는 행보
그의 출연작 리스트를 보면 재연보다는 초연 공연이 압도적으로 많다. 앞서 언급한 <오페라의 유령>이나 <지킬 앤 하이드>도 그렇지만 <맨 오브 라만차>(2005, 초연 제목 <돈키호테>)나 <쓰릴 미>(2007), <스위니 토드>(2007), <영웅>(2009), <몬테크리스토>(2010), <두 도시 이야기>(2012), <레베카>(2013), <프랑켄슈타인>(2014) 등 많은 초연 무대에 섰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아직 인지도가 높지 않은 작품이기 때문에 더욱 믿고 맡길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에게 뮤지컬배우로서 연기 인생의 변곡점이 있다면 아마도 <맨 오브 라만차>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세르반테스에서 나이 든 알론조 키하나 영감을 넘나드는 돈키호테 역을 맡아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자신은 작품의 이해와 깊이가 부족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처방전은 남달랐다. 대극장 주인공을 지속하는 대신 관객들과 지근거리에서 모든 것이 노출되는 소극장을 선택했다. <클로저 댄 에버>의 준희, 심리적인 갈등이 긴장을 더하는 2인극 <쓰릴 미>의 나, B급 코미디 뮤지컬 <이블데드>의 애쉬까지 이 시기 몇 년간 소극장 무대에 도전했다. <쓰릴 미>처럼 류정한의 재발견을 이끌어낸 작품도 있지만 소극장 출연이 모두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양한 시도들이 관객과 호흡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고 자신의 자리를 좀 더 명확히 알게 했다.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감식안
배우는 성실함과 노력도 필요하지만 타고난 재능을 무시할 수 없다. 류정한은 참 듣기 좋은 목소리를 지녔다. LG아트센터에서 정우성을 실제로 본 적이 있다. 멀리서부터 후광이 비치는 사람이 걸어왔는데 그가 정우성이었다. 주변 사람들을 자체 블러 처리해 버리는 외모였다. 류정한의 목소리는 외모로 치자면 정우성 급이다. 조곤조곤 말만 해도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가창력도 뛰어나지만 원 재료인 목소리 자체가 듣기 좋다. 그가 귀공자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젠틀한 외모의 영향도 있겠지만 팔 할은 목소리 때문이다. 그런 그가 잔인무도하고 냉혈한 살인마 <스위니 토드>를 연기한다고 했을 때 반듯하고 모범적인 이미지 때문에 공연계에선 우려 섞인 목소리가 있었다. 그런데 류정한은 스위니 토드를 그저 잔혹한 살인마로 보지 않았다. 최고의 이발사로서 섬세하고 완벽한 아티스트적인 기질이 있음을 간파하고 일반적인 살인마가 아닌 그만의 스위니 토드를 만들어냈다.

그가 지금까지 정상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재능과 가창력, 성실함과 노력도 있지만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텍스트 감식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인터뷰에서도 종종 이야기하지만 그는 작품이 좋으면 배역의 비중에 상관없이 참여한다. “어떤 작품의 배우여야지, 어떤 배우의 작품”이어서는 안 된다며 배우 중심으로 유지되는 공연계를 걱정하기도 했다. 배우로서는 하기 쉽지 않은 생각이다. 




그런 생각이 결국 그를 배우의 자리를 넘어 프로듀서에 도전하게 했다. 2017년 그는 프로듀서와 주연으로 뮤지컬 <시라노>에 참여했다. 그 길이 얼마나 고된 길인지 알기 때문에 아마도 주위 사람들의 적잖은 우려와 만류가 있었겠지만 그는 프로듀서 타이틀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감식안을 지녔고 작품에 대한 애정이 강한 그로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2019년 재공연된 <시라노>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흥행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는  여전히 바래지 않은 실력으로 대표 배우의 자리를 지키고 있고, 신인 프로듀서로서 공들인 작품의 완성도를 키워가고 있다. 그가 앞으로 프로듀서의 길을 얼마나 더 가려고 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프로듀서 류정한은 배우 류정한을 성장시키는 좋은 경험으로 작용할 것이다. 앞으로도 한결같이 그만의 자리를 지켜갈 것 같은 류정한. 그는 존재만으로 후배 배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9호 2020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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