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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뮤지컬 번역의 중요성, 뮤지컬 번역에 다가가기 [No.185]

글 |박천휘 작곡가·번역가 2019-03-06 4,815

뮤지컬 번역의 중요성,  뮤지컬 번역에 다가가기

 

한 해에 올라가는 작품 가운데 라이선스 뮤지컬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국내 뮤지컬 시장에서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분야가 바로 번역이다. 그렇다면 뮤지컬 번역의 현주소는 어떨까? 국내 주요 라이선스 뮤지컬을 책임지고 있는 대표 번역가들의 이야기와 현재 공연되고 있는 작품 사례를 통해 국내 뮤지컬 번역 세계를 살펴보자. 

 

 

국내에서 라이선스 뮤지컬이 본격적으로 공연되기 시작한 지도 어느새 15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뮤지컬이란 장르가 급격히 뿌리내리면서 한 해에도 수많은 라이선스 뮤지컬이 공연되고 있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뮤지컬 번역가란 직업도 자리를 잡고 있다. 최근 관객들, 특히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이 일고 있으며, 제작사들도 번역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뮤지컬 번역의 수준 역시 초기에 비한다면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이 일을 지속해서 하는 기술을 갖춘 전문가는 아직도 크게 늘고 있지 않다. 뮤지컬 번역은 좋은 뮤지컬 작가·작사가를 길러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훈련의 장이라고 생각하기에 더 많은 사람이 뮤지컬 번역에 도전해 보고 또 좋은 번역가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시작해 본다. 



 

뮤지컬 번역 작업에 다가가는 법 

10년 전만 해도 뮤지컬 번역은 제작자 주변 사람 가운데 영어 제일 잘하는 사람이 맡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사실 필자도 그렇게 시작했다. 하지만 번역을 지속해서 하다 보니, 번역은 정확하게 뮤지컬 작가와 작사가의 일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1900년대 뮤지컬의 태동기 브로드웨이에서 비엔나 오페레타가 유행했는데, 당시 지금의 한국과 비슷하게 미국에서도 오페레타 번역가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초기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작가와 작사가가 되었다. 또 한편에서는 영어에 서툰 비엔나의 작곡가들이 다수 미국으로 건너와 뮤지컬 작곡가가 되기도 했다. 뮤지컬 창작자들이 가장 흔하게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멜로디와 가사 중 뭘 먼저 쓰세요?’인데, 1950년대 뮤지컬 황금기 이전의 모든 뮤지컬은 작곡가가 가사 없이 멜로디를 먼저 쓰고 작사가가 그 멜로디에 맞게 가사를 썼다. 이를 ‘뮤직 퍼스트(Music First)’ 방식이라고 하며, 뮤지컬 번역은 정확하게 뮤직 퍼스트 가사 쓰기의 훈련장인 셈이다.

뮤직 퍼스트 가사 쓰기에서 중요한 점은 멜로디에 어울려 노래하기 좋은 가사를 쓰는 것으로 이는 작사가의 역할이다. 이 기술의 핵심은 음악의 강세에 가사를 맞춰 주는 것과 숨을 쉴 음악적 프레이징에 맞춰 말의 끊어 읽기를 맞춰주는 것이다. 사실 이것만 제대로 해도 노래하는 데 90퍼센트 이상의 문제는 해결된다. 나머지는 좀 더 세부적인 발음 문제와 어휘 선택, 명확한 문장 구조 만들기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이 모든 문제도 결국 노래를 많이 해 본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악보까지 볼 줄 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며,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뮤지컬 작사가·번역가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입에 붙여서 마음속으로가 아니라 직접 노래를 불러보는 행위이다. 그래야 가사에 대한 감각을 몸이 기억할 수 있으며, 나중에는 직접 불러보지 않고 가사를 쓸 때조차 이 감각이 자동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뉴욕에서는 뮤지컬 작사가·작곡가 콤비가 대중들과 만나는 콘서트를 자주 하는데, 이때 보면 의외로 작사가가 작곡가보다 노래를 훨씬 잘하는 경우가 많다. 뮤지컬에서 가사와 음악은 거의 한 몸이라 할 수 있고, 그만큼 노래를 많이 해본 사람만이 작사가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한국에서 현재 뮤지컬은 뮤직 퍼스트보다는 가사를 먼저 쓰는 ‘리릭 퍼스트(Lyrics First)’가 더 흔하다. 하지만 뮤지컬은 쓰는 것이 아니라 다시 쓰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 계속 작품을 고치는 과정에서 가장 흔히 하는 일이 가사 수정이기 때문에, 한 번 쓴 가사를 수정하는 것은 이미 뮤직 퍼스트 가사 쓰기와 같은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사를 먼저 쓰더라도 음악이 어떻게 붙을지를 아는 뮤직 퍼스트의 감각이 있는 사람만이 사실 리릭 퍼스트도 잘 쓸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앤드루 로이드 웨버, 끌로드 미셸 쇤베르크, 프랭크 와일드혼 등 멜로디를 중요시하는 작곡가들은 뮤직 퍼스트를 선호하고 있다.

 

원작에 대한 분석과 존경 

뮤지컬 가사 쓰기의 또 하나의 기술은 경제적 글쓰기 훈련이다. 영어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음절수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난다. 작사가는 같은 음표에 영어와 같은 음절수를 써야 하므로 낭비되는 음절수가 없이 가장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을 찾아 수많은 조합을 쓰고 또 고쳐봐야 한다. 가사를 붙이는 방법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며, 더 좋은 가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을 때만이 다듬어진 가사가 나올 수 있다. 원래 모든 예술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명확하고 단순한 것이다. 특히나 뮤지컬에서 가사와 대사는 관객의 입장에서 단 한 번밖에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직관적이며 간결한 말을 찾는 것이 좋다. 처음에는 이 과정이 힘들 수밖에 없는데, 비유하자면 가사 쓰기는 뇌로 하는 근력 운동이다. 모든 근력 운동처럼 가사를 쓰는 뇌 역시 훈련에 따라 발달하며 처음에는 고된 일이지만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으면서 저절로 되는 날이 올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 

뮤지컬 번역에서 두 번째 중요한 지점은 작가로서의 역량이다. 뮤지컬 번역가도 결국에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뮤지컬에서 가사는 특정한 극적 상황에 놓인 등장인물의 말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되며, 그 인물을 연기할 배우가 갈 길을 먼저 가보고 그에 가장 적합한 말을 찾아 주는 사람이다. 물론 이상적으로 직역만 잘한다면 원작자의 의도가 살아나면서 번역가의 역할이 끝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영어와 우리말이 일대일로 정확하게 대응할 수도 없거니와 완벽한 직역이란 것은 이상일 뿐이다. 번역 작가는 원작자의 의도를 극적 입장에서 해석하여 그것을 우리말에서 가장 효과적인 말로 재구성, 치환해야 한다. 번역가는 수동적인 기술자에서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해석가로 나설 때만 비로소 원작자의 의도를 역설적으로 살릴 수 있다. 원작자가 만약에 지금 우리말을 완벽하게 구사한다면 어떤 선택을 했겠느냔 질문에 대답하는 대리자가 바로 번역가이며, 그러기에 더더욱 원작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존경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번역가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바로 원작에서 이탈한 번역자의 주관이란 함정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번역가가 자기가 번역해야 하는 언어를 잘하는 것은 기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원작자에 대한 존중과 가사의 기술, 또 극적 감각만 뛰어나다면 원어민처럼 해당 언어를 잘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외국어를 잘할수록 뉘앙스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 뉘앙스를 더 잘 살려서 번역할 가능성도 커진다. 하지만 다양한 번역기의 발달과 검색 엔진의 발전 덕에 성실한 노력만 따른다면 언어 능력 또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 보았던 오역의 예는 대부분 영어를 잘하는 번역자의 부주의와 불성실함에서 온 것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뮤지컬 번역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작품을 가장 세밀하게 뜯어볼 수 있는 전지적 관점을 제공한다. 번역하려는 의도를 갖고 읽는 순간 텍스트는 살아나기 시작하며 자기에게 맞는 정당한 다른 말 옷을 요구해 온다. 번역은 뮤지컬 작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수많은 테크닉과 구조 등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시작이다. 뮤지컬 작사가와 작가의 입장을 이보다 더 가깝게 서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창작처럼 뼈를 깎는 고통을 동반한 일은 절대 아니다. 아니 이것은 정확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원작자가 제공한 지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기에, 정확하게 백 퍼센트 기술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모든 예술의 99%는 기술(땀방울)이다, 나머지 1%는 가장 중요한 영감이자 자기 회의와의 뼈를 깎는 사투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5호 2019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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