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라인, 오어 체인지>, 불어오는 바람 앞에 변하지 않은 ‘체인지’
웨스트엔드로 돌아오기까지
영국에서 12~1월은 페스티브 시즌이라 불리는 휴가 기간이다. 따라서 극장들 역시 이에 어울리는 가족극 또는 팬터마임(우리나라에 흔히 알려진 마임 공연이 아닌 영국 전통의 패러디 극)을 주로 공연하기 때문에 이번 호에 소개할 작품을 고르는 게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리뷰를 위해 어렵게 찾은 작품이 바로 <캐롤라인, 오어 체인지>였는데, 솔직히 처음 들어본 작품이다 보니 거의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티켓을 예매했다. 예매 전 내가 알고 있었던 정보는 토니 쿠시너가 대본을 쓰고 마이클 롱허스트가 연출을 했다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난 2018년 봄 내셔널 시어터에서 공연됐던 마이클 롱허스트 연출의 <아마데우스>를 무척 잘 봤고, 토니 쿠시너의 다른 작품들은 몰라도 <앤젤스 인 아메리카> 또한 워낙 좋은 작품이었기에 흥미를 끌었다.
<캐롤라인, 오어 체인지>는 1963년,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 위치한 레이크 찰스를 배경으로, 백인 가정의 가정부로 일하는 캐롤라인과 그 가족의 아들인 노아가 중심이 돼 이야기가 펼쳐진다. 뉴욕 퍼블릭 시어터에서 개발된 작품으로, 1992년 첫 워크숍 이후 꾸준한 워크숍을 거쳐 2003년 정식 공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이듬해 2004년 5월 브로드웨이에 입성해 약 3개월 반 동안 22회의 프리뷰를 포함해 158회 공연을 기록했다. 브로드웨이 공연은 토냐 핀킨스가 주인공 캐롤라인 역을 맡아 짧은 공연 기간에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토니 어워즈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모두 여섯 부문의 후보에 올랐다. <캐롤라인, 오어 체인지>가 런던에 처음 소개된 것은 2006년 내셔널 시어터의 리틀턴 시어터에 오르면서다. 내셔널 시어터 공연에도 토냐 핀킨스가 그대로 참여했는데, 웨스트엔드에서 연장 공연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올리비에 어워드에서 베스트뉴뮤지컬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넘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캐롤라인 역의 샤론 D. 클라크와 연출 마이클 롱허스트를 앞세워 웨스트엔드로 돌아온 것이다. 현재 웨스트엔드의 플레이하우스 시어터에서 상연 중인 이번 프로덕션 공연은 2017년 5월 영국 치체스터 페스티발에서 먼저 소개되었고, 2018년 3월 런던 햄스테드 시어터에서 공연을 마친 후 현재의 플레이하우스 시어터로 무대를 옮겨왔다.
굴곡의 역사를 지닌 극장, 플레이하우스 시어터
런던 템스강 북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5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골든 주빌리 다리 옆에 위치해 있는 플레이하우스 시어터는 웨스트엔드의 다른 극장들과는 다르게 극장 밀집 지역이 아닌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극장은 1882년 3월 11일 1200석 규모를 갖춰 로열 애비뉴 시어터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는데, 당시에는 코미디 오페라나 버라이어티 쇼 형식의 벌레스크, 풍자극 등이 주로 공연되었다. 그러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드라마 장르에 가까운 공연을 올리기 시작했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랜드 오브 하츠 디자이어(The Land of Heart’s Desire)>나 조지 버나드 쇼의 <무기와 인간> 등이 이 시기에 공연됐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때 극장 후원자 겸 경영자로 활동한 애니 호니맨이 한 시즌 동안 자신이 익명으로 후원하는 배우 플로렌스 파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는데, 첫 번째 프로덕션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친구에게 서둘러 희곡을 쓸 것을 종용해 탄생한 작품이 바로 조지 버나드 쇼의 <무기와 인간>이란 사실이다. <무기와 인간>으로 웨스트엔드에 데뷔한 조지 버나드 쇼는 공연이 성공하자 음악평론가 일을 그만두고 극작 활동에 100퍼센트 전념하기 시작한다.
애비뉴 시어터가 오늘날의 플레이하우스 시어터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은 1905년 재건축을 시작해 1907년 새롭게 극장 문을 열면서다. 새로 단장을 마친 극장은 객석 규모를 1200석에서 679석으로 줄이며 극장의 방향성을 재정립한다. 재개관 이후 1951년까지 헨리 다니엘, 나이젤 브루스 등의 배우들이 무대에 올랐으며, 영국의 전설적인 배우 중 한 명인 알렉 기네스는 이 곳을 통해 데뷔식을 치렀다. 1951년부터 1976년까지는 공영 방송사 BBC가 극장 운영을 맡아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맞는다. 라디오를 위해 라이브 퍼포먼스를 녹음하는 스튜디오처럼 사용되거나 비틀스, 롤링스톤스, 레드 제플린, 퀸 등 인기 밴드들의 라이브 공연이 열리는 등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공간이 쓰였기 때문이다. BBC가 극장을 떠난 후에는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하고 철거 위기에 몰리기도 한다. 그러다 10년 뒤인 1987년, 과거 극장으로서 역할을 되찾으며 다시 문을 열게 된다. 그 이후 지금까지 대표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여러 후원자들의 계속되는 후원과 지속적인 공연으로 중단 없이 운영되어 왔다.
플레이하우스 시어터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전형적인 프로시니엄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공연 성격에 맞게 좌석을 변형시켜 관객들의 관극 경험을 최고치로 끌어올린다는 점이다. 나는 이 극장에서 데이비드 마멧이 대본을 쓴 <글렌 개리, 글렌 로스>와 스티븐 달드리 연출의 <더 정글>을 관람한 적 있는데, <더 정글>의 경우 기존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극장 전체를 무대로 활용해 무척 인상적이었다. 바닥, 벽, 천장 등 극장 내부 전체를 ‘더 정글’에 맞게 개조해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만약 런던에 와서 차링 크로스와 엠뱅트먼트 역 근처를 거닐다가 문득 공연이 보고 싶어진다면, 플레이하우스 시어터에서 하는 작품을 관람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극장 근처에 아서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를 썼던 장소라고 전해지는 ‘셜록 홈즈’ 펍이 있어 공연을 보고 나서 맥주를 한잔하기에도 좋으니 말이다.
탄탄하게 명성을 쌓은 극작가 토니 쿠시너
다시 작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캐롤라인, 오어 체인지>라는 작품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될 사람은 극작가 토니 쿠시너다. 그의 희곡 가운데 최근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은 2017년과 2018년 각각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 양쪽에서 인기리에 공연된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라 할 수 있다. 파트 1과 파트 2로 나뉘어 러닝타임이 장장 7시간에 달하는 이 작품은 레이건 대통령 시절의 뉴욕을 배경으로 에이즈가 전 세계를 덮쳤던 시기에 그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다. 최근 화제를 모은 리바이벌 프로덕션은 근래 주목받는 연출가 중 한 명인 마리안느 엘리엇과 앤드루 가필드, 네이선 레인 등의 출중한 배우들이 만나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2003년 미국 케이블 방송사 HBO가 제작한 TV 미니시리즈 또한 많은 화제를 모은 훌륭한 작품이니 기회가 된다면 영상을 찾아 시청해 보길 권한다.
1956년 맨해튼의 러시아와 폴란드 계열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토니 쿠시너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루이지애나주의 레이크 찰스로 이사를 간다. 그리고 토니 쿠시너가 쓴 소개글에 따르면, <캐롤라인, 오어 체인지>는 1960년대 초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레이크 찰스가 겪었던 변화를 바탕으로 쓴 작품이라고 한다. 당시 미국에 퍼져 있던 인종 문제와 인권 운동에 대해 미국의 타지역과는 달리 좀 더 조용하고 다른 속도로 변화가 진행된 작은 남부 마을의 시선으로 이를 다루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는 1974년 컬럼비아 대학에 진학하면서 뉴욕으로 돌아왔고, 1978년 컬럼비아 졸업 후 뉴욕대 티쉬예술학교에 들어가 1984년 졸업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영화 작업에도 참여하기 시작한다. 스필버그 감독의 <뮌헨>, <링컨> 등과 덴젤 워싱턴이 주연과 감독을 겸한 <펜스> 또한 쿠시너의 손을 거쳐 각색된 작품이다. 그리고 최근엔 다시 한 번 스필버그 감독과 손을 잡고 <웨스트 사이트 스토리>의 각색을 진행 중이라고 전해졌다. 토니 쿠시너는 미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에 대해 비판한 것이 논란이 되며 정치적으로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다른 날 다른 곳에서 다르게 해야 할 것 같다.
작품의 마지막 카드, 제닌 테소리
“내가 다년간에 걸쳐서 생각해 오던 <캐롤라인, 오어 체인지>를 쓰기로 결심한 것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이 내게 리브레토(오페라의 대본)를 써달라고 했을 때다. 나는 캐롤라인의 초고를 조지 C.울프에게 가지고 갔다. 그의 도움으로 대본을 발전시키고, 또 그가 연출까지 맡아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조지는 프로젝트를 맡는 것을 수락했지만, 이 드라마에는 성악가들이 아닌 노래를 할 줄 아는 배우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 작품을 오페라가 아닌 뮤지컬로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다. 때마침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에서 작곡을 맡기로 했던 작곡가가 더이상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기로 하면서 우리는 뮤지컬 작곡가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의 첫 선택은 제닌 테소리였다.”
이는 토니 쿠시너의 <캐롤라인, 오어 체인지> 소개글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인데, 그의 말대로 이 작품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될 사람은 작곡가 제닌 테소리다. 아마도 미국 공연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여성 작곡가이자 음악감독으로 꼽히는 인물이니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첫 공연 경험으로 오프브로드웨이에서 본 <갓스펠>을 꼽았는데, 당시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어딘가에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고, 나는 그곳 말고는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오늘날 공연계에서 제닌 테소리가 갖는 의미는 수상 이력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그녀는 지금까지 다섯 편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참여해 다섯 차례 토니상 후보에 올랐는데, 지난 2015년 <펀 홈>으로 생애 첫 토니상을 거머쥔다. 특히 이 상은 극작과 작사를 맡은 리사 크론과 함께 여성 콤비 최초로 받은 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과거에는 1999년 링컨 센터에 오른 니콜라스 하이트너 연출의 <십이야> 리바이벌 프로덕션에서 음악감독을 맡아 드라마데스크 어워드 연극 부문 음악상을 받았고, 2004년 <캐롤라인, 오어 체인지>로 같은 상을 또 한 차례 품에 안는다.
이렇듯 제닌 테소리에게 상을 안겨준 <캐롤라인, 오어 체인지>이지만, 처음에는 제닌 테소리가 작품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대본이 이미 완성형인 데다 토니 쿠시너가 대본을 고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티스트로서 자기 고집이 확실한 두 사람이 만든 작품은 노래로만 이루어진 성스루 뮤지컬로 완성됐는데 1막과 2막 통틀어 무려 54개의 뮤지컬 넘버가 사용된다. 게다가 블루스, 모타운, 클래식, 유대인 전통 음악, 포크 뮤직 등 사용되는 장르도 다양하다. 그중 작품의 대표곡이라 할 만한 유명한 곡은 2막 후반부에 캐롤라인이 솔로로 부르는 ‘랏츠 와이프(Lot’s Wife)’일 것이다.
엇나간 선택이 남기는 아쉬움
이제 마지막으로, <캐롤라인, 오어 체인지>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캐롤라인, 오어 체인지>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대단한 작가와 엄청난 작곡가, 그리고 잘나가는 연출이 모였음에도 왜 이런 결과를 낳았나 하는 의문이 드는 작품이었다. 지금까지 런던에서 수많은 공연을 봤고, 그 많은 공연들 가운데 안 좋았던 작품을 꼽는 게 어려울 정도였는데, 안타깝게도 이번 공연은 아쉬운 작품 리스트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 배경이 1963년이라는 과거라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타원 모형의 벽 세트와 세 방향으로 따로 돌아가는 세탁기를 형상화한 듯한 중앙 무대, 그리고 시대를 반영한 의상 또한 어딘가 몸에 맞지 않은 듯한 인상을 자아냈다. 그리고 2퍼센트 부족했던, 정확히 말하면 내 시선을 끝까지 잡고 있지 못했던 배우들까지, <캐롤라인, 오어 체인지>는 전반적으로 아쉬움을 남기는 공연이었다. 개인적으로 공연을 보는 동안 극 전체의 서사를 따라갈 수 없었다는 점이 가장 아쉬웠다. 아마도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는 중심인물에 대한 포커스가 다른 인물들에게까지 퍼져 있어서 이런 결과를 낳은 게 아닐까 싶다. 분명히 캐롤라인의 이야기를 쫓아가야 하는데, 그 안에 유대인 가정에서 자라고 있는 노아의 성장기, 흑인으로서 인종적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캐롤라인의 아이들 이야기, 그리고 당시 정치 상황을 나타내주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까지, 이 많은 내용을 담아내려 하며 그와 동시에 노래까지 끊임없이 나오니 전혀 숨 쉴 곳이 없었다. 그나마 흥미롭게 봤던 부분은 세탁기, 건조기, 라디오, 달을 의인화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설정은 잠시 흥미를 끌었을 뿐 그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어디선가 봤을 법한 요소라 할지라도 뛰어나게 활용하거나 군더더기 없이 기본에 충실하거나, 이번 <캐롤라인, 오어 체인지>는 두 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다소 애매했다. 물론 이는 어쩌면 내가 작품의 깊이를 다 이해하지 못한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이 작품은 모든 재료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어도 그 요소들이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공연이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노래와 춤, 무대 효과, 의상으로 관객들의 마음에 변화를 불러일으키려고 했지만, 그 바람이 아무리 세찼어도 ‘체인지’를 느끼기엔 부족했으니 말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5호 2019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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