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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 아름답고 위험한 빛, 라듐 [No.184]

글 |안세영 2019-01-08 6,429

아름답고 위험한  빛, 라듐 

 

어두운 밤, 고된 연구에 지친 퀴리 부부는 둘만의 특별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실험실을 찾았다. 허름한 창고 실험실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시험관들이었다. 1898년 마리와 남편 피에르는 원소 라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마리 퀴리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 빛은 어둠 속에 유유히 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난생처음 느껴보는 황홀한 감정을 선사했다.’ 라듐이 뿜어내는 빛은 세상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이 희귀하고 값비싼 물질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만지고 심지어 먹고 싶어 했다. 신비로운 빛의 이면에 얼마나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당시만 해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라듐을 발견한 마리 퀴리

과학자 마리 퀴리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최초의 노벨상 2회 수상자, 여성 최초의 소르본 대학 교수, 여성 최초의 프랑스 의학 아카데미 회원 등등. 폴란드 출신의 가난한 프랑스 유학생이었던 마리가 이만한 명예를 얻을 수 있었던 건 라듐을 발견한 덕분이었다. 소르본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마리는 1895년 프랑스 물리학자 베크렐이 발견한 우라늄 광석이 스스로 빛을 내는 현상을 접하고 흥미를 느꼈다. 마리는 훗날 ‘방사능’이라고 명명한 이 독특한 현상을 박사 학위 연구 주제로 삼고 남편 피에르와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 1898년 퀴리 부부는 우라늄보다 무려 100만 배나 강한 방사성을 지닌 원소를 발견하고 ‘라듐’이라고 이름 붙였다. 
 

퀴리 부부가 염화라듐 추출에 성공한 후, 라듐의 상업적 이용이 활기를 띠었다. 만약 라듐 추출 과정을 특허로 냈다면 이들은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부는 과학의 발전을 위해 라듐 추출과 관련한 모든 정보를 서슴없이 공개했다. 덕분에 라듐 산업은 단기간에 화려하게 성장했지만, 퀴리 부부는 경제적 이득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라듐의 발견 이후 라듐이 포함된 이산화우라늄 광석의 가격이 폭등하면서 이들은 연구 재료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극소량의 라듐을 얻기 위해서도 수 톤의 이산화우라늄이 필요했기 때문에, 퀴리 부부는 이 비용을 외부 지원에 의지해야 했다. 그들은 버젓한 실험실도 없이, 여름에는 찌는 듯이 덥고 겨울에는 얼어붙도록 추운 허름한 창고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1903년 마리는 방사능 연구 공로를 인정받아 베크렐, 피에르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당초 마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상 후보에서 제외되었는데, 이 사실을 안 피에르가 노벨상 지명위원회에 호소문을 보낸 뒤에야 수상의 기회가 주어졌다. 이처럼 여성이 과학자로 인정받기 어려운 시대였지만, 1906년 피에르가 마차 사고로 죽은 뒤에도 마리는 혼자서 꿋꿋이 연구를 진척시켰다. 1908년에는 피에르의 교수직을 넘겨받아 소르본 대학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었고, 1910년에는 라듐 화합물에서 순수 라듐 금속을 분리하는 데 성공해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마리는 X선 치료 부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X선이 몸속에 박힌 총알과 유탄, 부러진 뼈의 위치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리는 프랑스 정부 승인 아래 X선 장비를 갖춘 20대의 이동 진료차를 마련하고, 딸 이렌을 포함한 150명의 여성을 X선 장비 기술자로 키워냈다. 이들은 전선을 누비며 백만 명 이상의 부상병을 치료했다.
 

하지만 라듐이 유명세를 떨치는 동안 마리는 방사능 때문에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방사능이 암과 같은 심각한 질병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퀴리 부부가 연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방사능의 위험성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노벨 물리학상 수상 당시 시상식에 참가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다. 하지만 부부는 이를 과로 탓으로만 여겼다. 전쟁이 끝난 후 라듐 연구소가 세워지자 그곳의 연구원들 역시 혈액 질환과 암으로 속속 쓰러졌다. 방사능이 원인이라는 증거가 제시됐지만 소장인 마리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연구진에게 정기적인 혈액 검사가 의무화된 후에도 마리 자신은 검사를 받지 않았다. 결국 방사능에 과다 노출된 마리는 만성피로와 백내장에 시달리다 1934년 67세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인공 방사능 동위원소를 발견해 1935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마리의 딸 이렌과 사위 프레데렉 졸리오 역시 이 직업병을 피해 가지 못했다. 



 

라듐의 위험성을 알린 라듐 걸스

한편, 미국에서는 라듐을 이용해 야광 시계를 만드는 사업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1916년 뉴저지주에 세워진 ‘라듐 루미너스 머터리얼’과 1922년 일리노이주에 세워진 ‘라듐 다이얼’사는 수백 명의 여성 도장공을 고용해 시계판에 라듐 성분을 섞은 야광 페인트 ‘언다크(Undark)’를 칠하는 일을 맡겼다. 
 

십 대에서 이십 대 사이의 젊은 여성 도장공들은 작은 시계 숫자에 페인트칠을 하기 위해 붓끝을 입에 넣어 뾰족하게 만드는 ‘립 포인팅’을 해야 했다. 기업들은 이 행위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라듐을 만지거나 먹는 것이 오히려 건강에 좋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당시 라듐은 암세포 파괴 효과(오늘날의 방사선 치료)가 있다고 알려지며 만병통치약 대접을 받고 있었다. 라듐 버터, 라듐 우유, 라듐 치약, 라듐 립스틱이 쏟아져 나왔고 부유한 고객들은 라듐을 건강 음료처럼 마셨다. 도장공들은 화제의 신물질 라듐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해했다. 당시 라듐은 그램당 가격이 12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24억 8천만 원)에 달하는 값비싼 물질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도장공들은 당시 여성으로선 최고 수입을 자랑했으니 그야말로 아쉬울 게 없었다. 작업을 마치고 퇴근하는 도장공들은 온몸에 묻은 라듐 때문에 희미하게 빛이 났다. 사람들은 그 모습이 천사 같다는 찬사를 보내며 이들을 ‘라듐 걸스’라고 불렀다. 


 

하지만 라듐은 도장공들의 생명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다. 1923년부터 도장공들은 의문의 병으로 고통받았다. 이가 빠지고, 턱뼈가 으스러지고,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 나갔다. 그제야 도장공들은 라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업들은 정부와 의사를 매수해 증거를 조작했다. 도장공들이 어렵게 변호사를 구해 소송을 시작했으나, 기업은 보상금을 줄이고 소송을 유리하게 이끌려고 고의로 재판을 지연했다. 도장공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끈질기게 기업과 싸웠다. 1925년 시작된 소송은 1939년에야 비로소 라듐 걸스의 승리로 끝났다. 그동안 고통 속에 죽어간 도장공의 수는 50명이 넘었다. 라듐 걸스의 투쟁 덕분에 방사능의 위험성은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고, 도장공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 지침이 도입되어 또 다른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 기념 연설에서 피에르 퀴리는 마치 이 모든 사건을 예견한 듯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라듐은 범죄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자연의 비밀을 캐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 비밀을 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인류는 성숙한가 하고….” 그의 말은 라듐이 세상에 가져온 눈부신 발전과 어두운 비극을 곱씹어 보게 만든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4호 2019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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