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본 2018 뮤지컬
올해 초 공연계에 파장을 몰고 온 미투 운동은 현실의 성폭력을 처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대 위에서도 변화를 이끌어 냈다. 주체적인 여주인공을 내세운 창작뮤지컬 <레드북>이 열띤 지지를 받았고, <맨 오브 라만차>, <번지점프를 하다>를 비롯한 다수의 작품이 성차별적이거나 성폭력적인 장면을 수정했다. <광화문 연가>의 월하, <더데빌>의 X, <록키호러쇼>의 콜롬비아처럼 성별에 관계없이 배우를 캐스팅하는 젠더 프리 캐스팅도 활성화되었다. 크고 작은 변화의 물결이 감지된 2018년, 무대 위 여성의 입지는 얼마나 나아졌을까? <더뮤지컬>이 연말결산의 일환으로 뮤지컬 속 여성 캐릭터의 현주소를 점검하는 시리즈 기사를 마련했다. 먼저 미투 운동 이후 재공연을 올린 작품들이 달라진 시대 감수성에 맞춰 문제적 장면을 어떻게 수정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한 해 동안 올라간 흥행 뮤지컬 속 여성 캐릭터를 소환해 그들이 극 중에서 그려지는 방식의 문제점을 짚어 본다. 마지막 글에서는 올해의 화제작 <베르나르다 알바>에 집중한다. 남성 편향의 공연계에서 10명의 등장인물이 모두 여성인 <베르나르다 알바>는 올해 가장 혁명적인 작품이다. 여기서는 이 공연이 여성이 처한 사회적 현실을 어떻게 고발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한편, 원작 희곡이 뮤지컬로 옮겨지면서 여성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파헤친다.
미투 운동이 바꾼 장면들
2005년 국내 초연한 <맨 오브 라만차>는 불가능한 꿈의 가치를 설파하는 감동적인 웰 메이드 뮤지컬로 꾸준히 인기를 누려 왔다. 하지만 공연이 올라갈 때마다 계속 지적당해온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여주인공 알돈자가 노새끌이들에게 윤간을 당하는 장면이다. 제작사는 알돈자를 극한의 좌절로 몰아넣기 위해 꼭 필요한 장면이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이는 왜 무대 위 여성의 시련은 늘 성폭력의 희생양이 되는 것으로 국한되는가 하는 의문을 낳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충분히 은유적인 안무로 표현될 수 있는 장면을 국내 프로덕션이 유독 폭력적이고 적나라하게 연출하였기에 반발감은 거셌다. 제작사는 지속적인 문제 제기를 받으면서도 해당 장면의 연출을 고수해 왔지만, 미투 운동이 일어난 뒤에도 이 문제를 모른 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올해 공연은 폭력의 수위를 낮추고, 강간 행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노새끌이들이 알돈자를 무대 밖으로 끌고 나가며 상황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당 장면을 수정했다. 하지만 노새끌이들이 알돈자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즐기는 모습은 여전히 지켜보기 괴롭다. 게다가 알돈자가 이 같은 시련을 겪고 또 극복하는 장면이 필요한 이유는 결국 돈키호테의 영웅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인데, 이러한 설정은 앞으로도 결코 수정되기 힘들 것이다.
마니아에게 사랑받아 온 창작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도 5년 만에 무대에 돌아오면서 일부 장면을 수정했다. 변화는 ‘그런가 봐’라는 곡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났다. 초연과 재연에서 남학생 현빈은 여학생 혜주에게 다른 학생들 앞에서 속옷을 선물한다. 당황해서 ‘네 눈엔 내가 이렇게 글래머로 보이니?’라고 따지는 혜주에게 현빈은 ‘일부러 제일 큰 거 산 거야. 이 정도면 쉽게 흘러내리겠지?’ 하고 능청스럽게 대꾸한다. 이어지는 노래 ‘그런가 봐’는 화가 난 혜주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애쓰는 현빈과 그런 둘을 지켜보는 남녀 학생들의 명랑한 합창곡이다. 하지만 성희롱에 가까운 현빈의 장난을 ‘너를 좋아해서 그런가 봐’로 퉁 치는 가사의 내용을 마냥 명랑한 마음으로 보기는 어렵다. 노래 중간에 한 여학생이 혜주를 편들며 ‘너희는 아직 너무 어리다’고 남학생 무리를 힐난하자, 남학생 하나가 그 여학생의 가슴을 가리키면서 ‘어리긴 니가 어리지’라고 놀리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미투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희롱과 성폭력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한 지금, 남학생들의 장난을 예전처럼 웃으며 넘길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듯, 올해 공연은 해당 장면에서 성희롱 발언과 행동을 모두 삭제했다. 현빈이 혜주에게 건네는 선물은 속옷 대신 뱀 모양 장난감으로 대체되었고, 어리다는 말을 받아치는 남학생의 대사는 ‘우리 다 동갑이거든’으로 바뀌었다. 남녀 학생이 편을 갈라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저렇다고 남녀의 행동을 정형화해 표현하는 가사도 수정되었다. ‘남자들은 이해 못하나 봐’라는 가사는 ‘너희들은 이해 못하나 봐’로, ‘남자는 원래 그래, 겉으론 말 잘 못해’라는 가사는 ‘쟤 맘은 안 그런데 표현을 잘 못해’로 고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장면이 야기하는 불편함이 말끔하게 사라진 건 아니다. 남녀 앙상블이 편을 갈라 이 노래를 부를 때, 그 밑바닥에 깔린 성별 이분법적 사고는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남자들이란 원래 나이가 들어도 철이 없어 여자를 괴롭히는 걸로 관심을 표현하며, 여자들은 싫은 척하면서도 그런 남자들을 밀어내지 못한다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 말이다. 수정된 장면이 전보다 나아진 건 맞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는 힘들다.
올해 초연을 올린 창작뮤지컬 <레드북>은 용감하게 여성의 성적 해방을 부르짖는 작가 안나의 이야기로 여성 서사에 목말라 있던 관객들의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이 작품도 처음부터 완벽했던 건 아니다. 지난해 시범 공연으로 첫선을 보였을 때, 관객들은 호응을 보내는 한편 몇몇 워딩에 대해 불편함을 드러냈다. 성차별 문제를 다룬 작품인 만큼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이 더 높은 수준의 젠더 감수성을 기대하는 건 당연했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해, <레드북>은 지적받았던 부분을 놀라울 만큼 꼼꼼하게 수정해 돌아왔다. 대표적인 예로 시범 공연 당시 ‘로렐라이’라는 곡에는 ‘예쁜 게 죄라서 사는 게 피곤했던 여인’ 로렐라이를 소개하기 위해 ‘그녀가 길을 나서면 남자들은 추파를 던졌고, 여자들은 돌을 던졌지’라는 가사가 쓰였다. 하지만 이는 남녀의 행동을 구분 짓고, ‘여성은 여성의 적’이라는 프레임을 고착시키는 표현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그리하여 정식공연에서 해당 가사는 ‘누군가는 추파를 던졌고, 누군가는 돌을 던졌지’로 바뀌었다. 또 극 중 감옥에 갇힌 거지가 안나와 대화를 나누려 하자 간수가 이를 저지하는 장면이 있는데, 시범 공연 때는 거지가 ‘기다려요, 아까 내 가슴 만졌잖아요’ 하고 짜증을 내자 간수가 마지못해 물러났다. 권력에 의한 성폭력을 보여 주려는 의도였겠지만, 두 인물이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했다고 비춰질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었다. 문제가 된 해당 대사는 정식 공연에서 아예 삭제되었다. 이밖에도 수정된 장면이 여러 개다.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여성 문학회 회원들이 ‘미인’, ‘요조숙녀’라고 대답하는 부분은 ‘사랑꾼’, ‘예술가’로 바뀌었다. 레드북을 읽고 감동받은 독자가 남편에게 ‘여보, 우리 다시 노력해 봐요. 오늘 당신이 좋아하는 닭고기 스튜를 해놓을게요’라고 말하는 대사는 ‘우리가 처음 입을 맞췄던 그곳에서 오늘밤 기다릴게요’로 바뀌었다. 더불어 장애인을 희화화하는 표현도 수정되었다. 시범 공연 때는 안나가 자신을 성희롱한 상점 사장을 ‘고자 사장님!’이라고 불러 골려 주었는데, 정식 공연에서는 ‘발정난 사장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레드북>은 기본적으로 가진 건 많지만 사랑에는 미숙한 남자와 가진 건 없지만 사랑이 넘치는 여자 사이의 로맨틱 코미디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최대한 변화의 요구를 수용하려 한 창작진의 노력은 높이 살만 하다. 관객의 목소리를 ‘프로불편러’의 생떼 취급하지 않고 귀 기울여 들은 이 작품이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두루 인정받는 올해 최고의 창작뮤지컬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을 여러 제작사와 창작자가 눈여겨보길 바란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3호 2018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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