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역사를 만든 여성들
올겨울 국내에 상륙할 디즈니 뮤지컬의 자랑 <라이온 킹>을 설명할 때 절대 빠지지 않고 첫 번째로 언급되는 이름이 있다. 거대한 밀림의 왕국을 훌륭하게 무대로 옮긴 <라이온 킹>의 수장 줄리 테이머 말이다. 1997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라 벌써 20년이 넘도록 여전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작품답게 초연 이듬해 열린 토니상의 연출상은 당연히 줄리 테이머의 차지였다. 그런데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라이온 킹> 이후 탄탄대로에 올라섰을 것 같은 줄리 테이머가 거머쥔 또 다른 토니상은 무엇이었을까? 또한 이런 궁금증도 생길 것이다.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뉴욕과 런던 공연예술계의 상징적인 시상식 토니 어워즈와 올리비에 어워즈에서 트로피를 차지한 여성 창작자로는 또 누가 있었을지. 남성 중심의 공연계에서 역사를 일구어낸 여성 예술인들의 이야기. 이것이 바로 이번 호 특집 기사의 주제다.
내가 사랑한 무대 속 여성
여성으로서 사회의 높은 벽에 부딪칠 때마다 절감하는 점은 우리에게는 더 많은 여성 롤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작품으로 용기를 주는 생면부지의 창작자부터 바로 앞에서 직접적으로 좋은 영향을 준 배우까지,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내가 사랑한 훌륭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
마샤 노먼·옌틀, 여성이 말하는 여성의 이야기
<시크릿 가든>은 내가 페미니즘을 접한 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 뮤지컬이다. 오랫동안 좋아해 온 이 작품이 여성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보기 드문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았다. <시크릿 가든> 브로드웨이 초연에 참여한 극작가 마샤 노먼, 작곡가 루시 사이먼, 연출가 수잔 H. 슐만, 프로듀서 겸 무대디자이너 하이디 에틴저는 모두 여성이다. 심지어 원작 소설 작가인 프란시스 호지슨 버넷과 주인공 메리 레녹스까지 몽땅 여성이다! 이뿐인가, 이들 가운데 셋은 1991년 토니상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마샤 노먼은 극본상, 하이디 에틴저는 무대디자인상, 메리를 연기한 11세의 데이지 이건은 최연소 여우조연상을 차지했다.
이 유능한 여성들 가운데서도 유독 내 마음을 잡아끈 이는 바로 마샤 노먼. 그가 쓴 대본과 가사가 아름다워서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그가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이다. <시크릿 가든>의 주인공 메리는 부모님을 잃고 고모부의 대저택에 살게 되면서 황폐했던 집 안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비슷한 역할을 하는 <애니>의 고아 애니와 달리 메리는 마냥 밝고 순수한 소녀가 아니다. 메리는 반항적이고 무뚝뚝하며 자기주장이 강하다. 노먼은 그런 메리의 캐릭터를 분명히 인식하고 표현했다. 그 증거로 2016년 데이지 이건과 함께한 ‘플레이빌’ 인터뷰에서 그는 이건을 캐스팅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넌 새로운 유형의 소녀였어, 아니? 넌 <애니>에 나온 애들 같지 않았지. 넌 생각과 요구를 가진 소녀였어.”
첫 뮤지컬인 <시크릿 가든>에 참여하기 전까지 마샤 노먼은 페미니즘 연극으로 명성을 쌓았다. 그는 주로 여성을 향한 사회적 억압과 이를 극복하려는 여성의 자주적인 모습을 그린 작품을 썼다. 1979년 데뷔작인 <게팅 아웃>과 1983년 퓰리처상을 받은 <나이트, 마더>가 대표적이다. 노먼이 대본을 쓴 또 다른 뮤지컬이 흑인 여성의 자아 찾기를 그린 <컬러 퍼플>과 아내이자 엄마로만 살아온 중년 여성이 사랑에 눈뜨는 순간을 그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사실은 그의 관심사를 뚜렷이 보여준다. 2011년 ‘브로드웨이월드닷컴’과의 인터뷰에서 노먼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렇게 요약하기도 했다. “내 모든 작품은 덫에 걸린 소녀에 대한 이야기예요.”
마샤 노먼은 작품 밖 현실에서도 성평등 운동에도 앞장서 왔다. 2010년 그는 미국 공연계 여성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12명의 여성을 뽑아 시상하는 ‘릴리 어워즈’를 만들었다. 또한 극작가 협회와 손잡고 정기적으로 미국 내 공연에 참여한 여성의 비율을 조사해 공연계의 남성 편향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2016년 ‘브레이킹 캐릭터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마샤 노먼은 이런 말을 남겼다. “여전히 공연계를 남성이 지배한다고 생각하느냐고요? 맞아요, 많은 부분 그렇다고 생각해요. <해밀턴>이나 <컬러 퍼플> 리바이벌, <웨이트리스> 같은 작품들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건 분명해요. 하지만 모든 창작진이 여성으로 구성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나온 건 <웨이트리스>가 최초예요. <시크릿 가든> 이후 25년 만에! 그게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고, 내가 ‘릴리 어워즈’를 만든 이유예요. 그게 우리가 공연계 남녀 동수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이유예요.” 작품 속에서나 작품 밖에서나 여성이 처한 불평등한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 마샤 노먼의 일관된 행보는 나에게 여느 뮤지컬 속 주인공 못지않게 큰 용기와 영감을 준다. 그가 꾸준히 강조하는 다음의 메시지는 내가 지금의 국내 공연계에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니까. “우리는 여성이 말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원해요. 우리는 무대에서 남자만이 아닌 모든 인간이 함께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어요.”
‘여성이 말하는 여성의 이야기’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하나 더 있다. 유대인 가수이자 배우 스트라이샌드가 직접 제작, 각본, 감독, 주연을 도맡은 뮤지컬 영화 <옌틀>이다. ‘타임즈 업(Time's Up)’ 운동이 골든 글로브 시상식을 휩쓸었던 올해 초, 시상자로 나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수상 후보의 성차별 문제를 꼬집었다. “저는 골든 글로브의 유일한 여성 감독상 수상자입니다. 아시다시피 그건 34년 전인 1984년의 일이죠. 여러분, 시간이 됐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여성 감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여성 감독이 후보에 올라야 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골든 글로브의 유일한 여성 감독상 수상작이 바로 <옌틀>이다.
작품은 남성에게만 학문이 허락된 시절, 누구보다 배움에 목말랐던 유대인 소녀 옌틀의 이야기다. 아버지에게 몰래 탈무드를 배우던 옌틀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남장을 하고 학교에 들어간다. 최고의 우등생이 된 옌틀은 마음껏 책을 읽고 토론하며 행복을 느끼지만, 학우인 아빅도어를 사랑하게 되면서 갈등에 빠진다. 옌틀의 비밀을 모르는 아빅도어는 약혼자였던 하다스와의 결혼이 어긋나자 옌틀에게 자신 대신 하다스와 결혼해 달라고 부탁한다. 결국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옌틀이 하다스와 결혼하면서 상황은 점점 꼬여 간다.
내가 <옌틀>을 보게 된 건 뮤지컬 관련 서적을 뒤적이다가 ‘페미니즘 뮤지컬’이라는 소개 문구에 꽂혀서였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주인공 옌틀이 이끌어가며, 노래도 전부 옌틀의 감정을 표현하는 솔로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엇보다 세상 모든 일의 이치를 궁금해하고 끊임없이 ‘왜?’라고 묻는 옌틀은 똑똑하고 용감한 여성 뮤지컬 캐릭터에 목말라 있던 나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다가왔다. 옌틀과 아빅도어가 창세기의 해석을 놓고 논쟁하는 장면을 보시라. 옌틀은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해석은 히브리어를 오독한 것이며, 제대로 된 해석은 아담의 ‘한 면’이 이브가 되었다는 것, 즉 우리 모두가 남성성과 여성성을 공유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에, 똑똑한 페미니스트는 늘 짜릿하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퀴어 로맨스 요소인데, 내게는 메인 커플인 아빅도어와 옌틀의 브로맨스 아닌 브로맨스보다 하다스와 옌틀의 우맨스가 훨씬 흥미로웠다. 하다스와 옌틀은 단순히 아빅도어를 사이에 두고 씨름하는 연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옌틀은 여성으로서 남성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만을 강요받아 온 하다스에게 동병상련을 느끼고, 그에게 몰래 탈무드를 가르쳐 주며 스스로를 존중하도록 이끈다. 하다스 또한 다른 남자와 달리 자신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옌틀에게 색다른 끌림을 느낀다. 영화가 옌틀이 지질한 아빅도어를 걷어차고 하다스와 행복하게 사는 결말로 끝나지 않은 게 애석할 따름이다.
<옌틀>의 전개는 대체로 남장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성애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따른다. 하지만 결말은 남녀가 맺어지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여타 작품들과 다르다. 진실을 알게 된 아빅도어가 옌틀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아내가 되어달라고 말할 때, 옌틀은 이렇게 대꾸한다. “아니, 난 너와 함께 공부가 하고 싶은 거야, 너의 양말을 깁고 싶은 게 아니라!” 그리고 옌틀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아 떠난다. 혼자서, 아직도 알고 싶은 것으로 가득한 세상을 향해. 마지막 장면에서 옌틀은 노래한다. “더 많이 원하는 게 뭐가 문제야?” 그 노래를 들으며 어쩌면 나도 모르게 단념해 버렸을 더 많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봤다. 적어도 이 가능성만큼은 포기하지 말아야지. 언젠가 옌틀처럼 나를 사로잡는 여성들이 무대를 가득 채울 가능성! 멋진 여주인공을 더 많이 원하는 게 뭐가 문제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0호 2018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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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내가 사랑한 무대 속 여성, 마샤 노먼·옌틀 [No.180]
글 |안세영 2018-10-01 6,064sponsored adv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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