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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내가 사랑한 무대 속 여성, 제닌 테소리 [No.180]

글 |배경희 2018-10-01 5,039

뮤지컬 역사를 만든 여성들
올겨울 국내에 상륙할 디즈니 뮤지컬의 자랑 <라이온 킹>을 설명할 때 절대 빠지지 않고 첫 번째로 언급되는 이름이 있다. 거대한 밀림의 왕국을 훌륭하게 무대로 옮긴 <라이온 킹>의 수장 줄리 테이머 말이다. 1997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라 벌써 20년이 넘도록 여전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작품답게 초연 이듬해 열린 토니상의 연출상은 당연히 줄리 테이머의 차지였다. 그런데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라이온 킹> 이후 탄탄대로에 올라섰을 것 같은 줄리 테이머가 거머쥔 또 다른 토니상은 무엇이었을까? 또한 이런 궁금증도 생길 것이다.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뉴욕과 런던 공연예술계의 상징적인 시상식 토니 어워즈와 올리비에 어워즈에서 트로피를 차지한 여성 창작자로는 또 누가 있었을지. 남성 중심의 공연계에서 역사를 일구어낸 여성 예술인들의 이야기. 이것이 바로 이번 호 특집 기사의 주제다. 

내가 사랑한 무대 속 여성
여성으로서 사회의 높은 벽에 부딪칠 때마다 절감하는 점은 우리에게는 더 많은 여성 롤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작품으로 용기를 주는 생면부지의 창작자부터 바로 앞에서 직접적으로 좋은 영향을 준 배우까지,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내가 사랑한 훌륭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     

제닌 테소리, 쟁취하는 여성 




내가 제닌 테소리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9년 전쯤 <더뮤지컬>에 실렸던 기사를 통해서였다. 당시 기사의 코너명은 ‘Contemporary Songwriters’. 박천휘 작곡가가(뮤지컬 번역가로도 활동하는) 한 해 동안 기고를 맡은 연재 기사였는데, 2000년대를 전후해 브로드웨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작곡가들을 매달 한 명씩 소개하는 코너였다. ‘젊은 뮤지컬’ <렌트>로 1990년대 브로드웨이에 혁명을 일으킨 조나단 라슨, 그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젊은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으로 브로드웨이에 커다란 파열음을 낸 던컨 쉬크, 음악상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트로피를 거머쥔 디즈니의 전설적인 작곡가 앨런 맨켄, 대형 히트작 <위키드>의 작곡가라는 사실로 모든 것이 설명될 것 같은 스티븐 슈왈츠… 그리고 또 누가 있었더라. 아직도 하나 분명하게 기억하는 부분은 ‘남자’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명단 중에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여성 작곡가가 바로 제닌 테소리였다는 것이다. 

그의 기사에 붙여진 제목은 ‘유연함과 음악성으로 브로드웨이를 평정하다’. 브로드웨이를 평정한 여성이라니. 너무 근사하지 않은가. 그 기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아빠를 따라 의사가 되기를 꿈꿨던 그녀가 아이들을 위한 여름 뮤지컬 캠프에 자원했다가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전공을 바꾸고 작곡가의 길에 들어섰다는 부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주입됐을 쉬운 인생을 사는 대신 제 힘으로 인생의 방향을 자신에게 맞게 바꾸었다는 게, 그 시기의 나에게 꽤나 자극으로 다가왔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유의 드라마를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용기를 주니까.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작곡가 제닌 테소리에 빠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지난 2013년 오프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라 2015년 브로드웨이 입성에 성공한 <펀 홈>의 OST를 듣고 나서야 제닌 테소리의 음악 세계에 빠져들었으니까. <펀 홈>은 작품에 담긴 레퍼런스가 너무 많아 쫓아가기가 버거울 만큼 지적인 앨리슨 벡델의 동명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하는데, 아빠가 자살한 후 아빠의 정체성(클로짓 게이)을 알게 된 딸이 성인이 돼 자신의 정체성(레즈비언)을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얼핏 봐도 주류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 작품에서 작곡가 제닌 테소리와 파트너십을 발휘한 작가는 리사 크론. 그러니까 이성애자 여성보다 더욱 사회적 약자로 여겨지는 여성 그룹인 레즈비언의 이야기를, 브로드웨이에서 좁은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 창작자들이 만든 것이다. <펀 홈>은 그해 열린 토니상에서 당당히 최우수 작품상을 차지했으며, 제닌 테소리와 리사 크론은 토니상 70년 역사에서 여성 콤비 최초로 베스트 스코어상까지 제 손에 넣었다. 기회는 또 다른 기회를 만든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는 얼마나 짜릿한 일인지. 만약 이 페이지를 펼치기 전까지 제닌 테소리에 대해 몰랐지만 이제 막 제닌 테소리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면, 딱 5분만 하던 일을 멈추고 <펀 홈>의 오프닝 곡 ‘It All Comes Back’을 들어보길. 장담하건대 쉽게 정지 버튼을 누를 수 없을 것이고, 세 번째 곡 ‘Welcome to Our House on  aple Avenue’를 지나 여섯 번째 곡 ‘Come to the Fun Home’에 이른다면, 결코 뮤지컬화가 쉽지 않았을 이 작품이 뮤지컬이란 보수적인 세계에 무리 없이 안착할 수 있도록 그가 어떤 통찰력과 빛나는 재능을 발휘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제닌 테소리에 대한 매력적인 정보 하나 더, <펀 홈>의 사례만 보자면 비상업 뮤지컬 작업만 할 것 같지만 지난 2008년 브로드웨이에 올랐던 상업 뮤지컬 <슈렉>의 음악도 그가 썼다는 사실. 보통의 잘나가는 남자들처럼 상업과 비상업, 주류와 비주류를 오가는 여성 창작자. 내가 제닌 테소리를 롤모델로 삼고 싶은 또 다른 이유다. 끝으로 그의 멋진 말을 옮기고 싶다. “내가 너무 많은 걸 요구했나? 내가 욕심이 과했나?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했나? 나는 여성들이 여성으로서 삶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다. 나와 같은 여성들이 지금껏 여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남자들의 ‘진지한 일’에 뛰어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가 여성 후배 작곡가에게 멘토링을 해주는 유일한 이유다. 나는 그녀가 작곡가로서 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내가 도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도울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0호 2018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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