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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아직도 할 일이 많아요 <빌리 엘리어트> 정영주 [No. 86]

글 |이민선 사진 |심주호 헤어.메이크업 | 지수화풍(02-512-7024) | 장소협찬|Cafe 535-7(02-543-2722) 2010-11-08 6,193


 

‘빌리’라는 아역 배우에 관심이 집중된 탓에 <빌리 엘리어트>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상대적으로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흘려 볼 수 없는 묵직한 존재감으로 빌리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윌킨슨 선생님 역의 배우 정영주이다. (인터뷰를 한 지 한 주 후에 열린 한국뮤지컬대상 시상식에서 그녀는 여우조연상을 받아 그 존재감과 실력을 인정받았다.) 빌리를 만나서 빌리만큼 행복하고 빛나는 순간을 맞고 있는 윌킨슨 선생님은 지금 기분이 어떨까.

 

 

<오페라의 유령>에서 마담 지리를 연기하고 곧바로 <빌리 엘리어트>의 윌킨슨 선생님을 맡으셨어요. 두 인물의 캐릭터가 많이 다르지만 둘 다 발레 선생님이네요.
주위에서도 그러더라고요. 제 팔자에도 없는 발레 선생님이 되었다고요. 그러고 보니 10년 전에는 발레를 하고 싶어 하는 뚱뚱한 흑인 학생 역할도 했군요. <페임>의 메이블 말예요. 제가 발레를 배운 것은 16년 전에 처음 뮤지컬에 입문해서 ‘에이콤’의 배우 교육으로 받았던 8개월이 전부예요. 물론 그 이후에도 공연을 위해서 단기간이지만 혹독하게 배우곤 했고요. 그때 배웠던 것을 몸이 기억하는 것을 보면 허투루 배우지는 않았던 모양이에요. 다행이지요.

 

마담 지리와 윌킨슨 선생님뿐만 아니라 이전에 맡았던 역할들이 대부분 주인공의 행보에 큰 영향을 주는 조연이고, 코믹하지만 가볍지 않고 묵직한 역할이었어요.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과 체격도 영향을 주겠지만 그게 아닌 자신만의 비결이 있을 것 같은데요?
외향으로나 성격으로나 제가 무게감이 좀 있죠. 학창 시절에도 친구들을 몰고 다니곤 했어요. 리더십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재미있는 성격이어서요. 생각한 대로 솔직히 말하는 타입이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평소 성격이 극에도 반영되는 모양이에요. 처음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대기실에 저처럼 생긴 사람은 저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합격 소감으로 “저 같은 거 뽑아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더니 “너처럼 생겨서 뽑았다”고 하시더군요. 저도 처음에는 여주인공에 어울리는 캐릭터가 아닌 것이 안타깝고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바꿔서 생각하게 되었어요. 예쁜 여주인공 캐릭터가 있으면 저 같은 사람도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제 캐릭터 파악을 일찍 한 것이 제게 도움이 되었어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즐길 수 있게 되었거든요.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다를 수 있는데, 저는 다행히도 둘이 잘 맞는 경우가 많았어요.


윌킨슨 선생님에 대한 첫인상은 어땠나요?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첫인상은 만약 ‘헬렌 켈러’라는 뮤지컬이 있다면 설리반 선생님에 해당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거룩해 보였어요.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빌리의 재능을 발견하고 가르쳐주는 사람이니까요. 이건 딴 이야기인데, <빌리 엘리어트> 오디션을 볼 때 쟁쟁한 배우들이 많았어요. 그 사이에서 제가 뽑히기엔 역부족으로 느껴졌죠. 그런데 안무가 탐 호그슨을 보는 순간 모든 고민은 다 사라졌어요. ‘저 안무가 정말 멋있다!’ 제가 잿밥에 관심이 많은 타입이거든요. (웃음) 아무튼 오디션을 즐겁게 봤어요.
대본으로만 볼 때 윌킨슨은 무심하고 무뚝뚝한 사람이었어요. 연습하면서 그녀가 경험했을 실패와 낙오, 그리고 상처를 알게 되었죠. 똑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저도 그런 상처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보니, 그런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면 친절하기보다는 자기 방어를 위해 더 거칠게 말하겠구나,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공연을 거듭하면서 윌킨슨에 더욱 동화되었을 것 같아요.
윌킨슨은 표현이 서툴러요. 올곧게 표현하지 못하죠. 하지만 저는 애정 표현을 잘 하는 편이라 처음에는 동화되기 어려웠어요. 아역 배우들이 울먹거리면 저도 감정이 복받치는데, 연출가 비티는 윌킨슨이 그러면 안 된다고 해요. 저는 ‘애가 우는데 어떻게 안 그러냐?’ 하는 마음이죠. 하지만 윌킨슨의 마음을 알아요. 오랫동안 마음을 열고 살지 못한 사람인데 빌리를 만나면서 달라져요. 그 어린 꼬마 녀석 하나가 탄광 마을을 얼마나 크게 변화시켜요! 윌킨슨과 제가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어떤 모습이 윌킨슨이고 정영주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윌킨슨은 근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지만 마음이 여리고 사랑을 주는 데 서툰 사람이에요.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주지 못하는 거죠. 그런 면에서 그녀가 많이 안타까워요. 오로지 마음이 가는 것은 빌리뿐일 거예요. 윌킨슨은 집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있다가도 빌리 생각이 나겠구나, 빌리를 짝사랑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돼요.


그러면 빌리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라고.
다른 친구들은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데, (이)지명이는 장난으로 그렇게 말하죠.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관심 끊으세요!” 라고. (김)세용이가 어느 순간 “선생님, 괜찮으세요?”라고 한마디하면 제가 감동 먹어요. 그렇게 어른스럽고 남자다울 때가 있어요. (웃음)


빌리 역의 배우가 네 명이다 보니 각각의 배우와 교감하는 지점이 다를 것 같아요.
확실히 그렇죠. 세용이와 오랜만에 ‘더 레터(The Letter)’ 장면을 연습한 적이 있어요. 서로 어색할 것 같아서 연습 전에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대본에 없는 빌리와 윌킨슨의 대화인 거죠. 엄마가 쓴 편지라는 말에 윌킨슨이 조금 놀라잖아요. “우리 엄마는 죽었는데 엄마의 편지라고 하니까 놀라신 거죠?”라는 물음에 “맞아. 난 네 엄마가 3년 전에 죽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말이지. 죽은 엄마가 쓴 편지를 감히 내가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너는 왜 읽어보라고 한 거냐?” 라고 응하는 식으로 전보다 더 깊이 이야기했어요. 그러고 나서 그 장면을 연습했는데 세용이가 그 장면에서 처음으로 울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우리 둘이 공유하는 감정이 계속 유지가 돼요.
빌리가 발레 스쿨에 합격하고 마지막으로 수업에 와서 감사 인사를 해요. “일찍 와서 말하려고 했는데, 알잖아요~”라고 얄밉게 예쁜 척을 하면서 말이죠. 그 장면에서 (정)진호와 지명이는 참 달라요. 진호는 애교 부리는 걸 되게 어색해 하거든요. 연습 때 입으로는 애교 섞인 대사를 하면서도 눈은 울고 있었어요. 그게 아니라고 눈도 웃으라고 하면 쑥스러워서 쉬이 시도하지 않았어요. 그 녀석은 완벽주의자라 미리 연습이 되어 있어야만 보여주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혼자 연습하고 왔는지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이더라고요. 지명이 같은 경우는 오버하듯이 “에이~ 알잖아요!” 하면서 애교를 잘 떨어요. 그러면 저도 지명이 표정 따라하면서 응하곤 하죠.
(임)선우는 입모양이 웃겨요. 양쪽 입꼬리를 올리고 ‘히’ 웃는 표정이며, 이를 앙다문 표정 같은 거요. 화장실에서 윌킨슨이 로얄 발레 스쿨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면 빌리가 “거기 가기엔 나이가 좀 많지 않으세요?”라고 묻죠. 선우는 ‘좀~’을 늘려 발음하면서 입술로 ‘미음(ㅁ)’자를 만들어요. 웃으면 안 되는데 그 입모양을 보면 너무 웃겨서 대사가 한 박자 늦게 들어가요. “흣, 나 말고 너, 이 바보야!” 이렇게요.


<빌리 엘리어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제 개인적으로요? ‘그랜드마 송(Grandma’s Song)’이요. 이주실 선생님이 정말 사랑스러운 장면이에요. 남자 앙상블의 훌륭한 움직임을 보면 바다 깊은 곳에서 춤추는 것 같아요. 피터 달링의 안무도 굉장히 멋있지만 저희 앙상블의 노력과 실력도 대단하죠. 이번 시상식에서 앙상블 상은 저희 겁니다! (아쉽게도 앙상블 상은 받지 못했다.) ‘그랜드마 송’을 하는 동안 저는 ‘솔리대리티(Solidarity)’ 장면을 위해 무대 뒤에서 의상을 갈아입는데, 그때 할머니의 노래를 따라 부르곤 해요. “난 끔,찍,했,다!” 하고요. 참, 이 장면에서도 네 빌리의 표정이 다 달라요. 그걸 보는 재미도 있죠. 진호는 할머니가 걱정되면서도 할머니 말씀이 웃겨서 울까 웃을까 하는 표정이에요. 선우는 정말 천진난만하게 눈을 똥그랗게 뜨고 보고요. 지명이는 걱정스럽게 ‘아유, 우리 할머니 노망났어’라는 표정, 세용이는 무심한 듯하지만 할머니를 깊이 관찰하듯이 쳐다보는 표정이에요.
문 안과 문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솔리대리티’ 장면도 정말 좋아요. 또, 리허설 때면 “미안하다 빌리, 너한테 더 이상 희망이란 없나 보다” 라고 말하고 문을 쾅 닫고 퇴장하자마자 객석으로 나갔어요. ‘앵그리 댄스(Angry Dance)’를 보려고요. 빌리의 춤과 앙상블의 군무가 어우러져서 정말 소름이 돋죠.


윌킨슨은 표현이 서투르고 거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리를 아끼는 게 느껴져요.
윌킨슨이 무심하지만 살짝살짝 마음을 내비치는 때가 있어요. 정영주였다면 빌리가 잘할 때마다 볼을 꼬집으면서 뽀뽀를 퍼부었을 테지만, 윌킨슨이니까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이 꼬맹이 녀석은 뭐지?’ 의아해 하면서도 내 감정이 들킬까봐 얼른 “오늘 수업 끝!”이라고 말하고 나가버리죠. 하지만 나가면서도 그 매력적인 모습에 반해 빌리를 향해 아주 작게, ‘앞으로 더 두고 보겠다’는 뉘앙스의 손짓을 해요.
그리고 사실 이건 연출이 의도하지 않은 장면인데, 마지막 수업에서 빌리가 감사 인사를 하면 덤덤하게 듣지만 순간적으로 아주 짧게 미소가 지어져요. 그래 놓고 곧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그래 잘해 봐라” 하고 말죠. 공연을 거듭할수록 그런 세심한 감정을 찾아가는 것이 재미있어요. 물론 빌리들은 모르는, 나만의 감정이죠.


윌킨슨이 빌리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윌킨슨 역시 현실 때문에 발레의 꿈을 펼치지 못했는데 빌리가 그 꿈을 대신 이루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죠. 가르치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직접 하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윌킨슨은 전자인 것 같아요. 천재적으로 발레를 잘하는 능력을 갖진 못했지만, 보고 들은 게 있어서 그런 별을 찾아내는 눈이 있는 사람인 거죠. 빌리를 보니 모난 것만 조금 깎아주면 별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우연찮게 생각한 일이라 빌리가 합격하는 데 100퍼센트 확신은 없지만 한번 내질러 보는 거예요. 빌리를 발레 스쿨에 보내기 위해 연습하는 동안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열정이 나오고 그것이 빌리의 열정과도 맞아떨어지고요. 빌리를 통해 잠깐이지만 자신의 행복과 열정을 되찾는 거죠.


빌리와 데비에게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달라요.
내 자식이라서 더 못 챙기고 더 객관적이지 못하고, 그런 것 같아요.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닌데 애정 표현이 왜곡된 거죠. 윌킨슨은 데비에게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거칠게 소리만 쳐요. 그러니까 데비도 그런 성격의 아이가 될 수밖에 없고요. 아이들이 그런 것은 부모에게 원인이 있는 것 같아요.
제게도 아홉 살짜리 아들이 있는데 제 아들은 잘 못 챙기면서 공연장에 와서 다른 아이들을 챙기고 있으면, 아들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아들이 보고 싶으면 아역 배우들한테 더 잘해 주게 되지요.

 

유난히 아역 배우들이 많은 공연이라 아들 생각이 많이 나겠어요.
그래서 웬만하면 공연 외에 다른 약속은 잡지 않아요.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간식 챙겨주고 ‘방과후학교’에 데려다주지요. 아들은 엄마와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어서 안 가려고 난리고요. 결혼한 선배들과 이야기해 보면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하더군요.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여자로, 또 배우로 사는 게 참 쉽지 않아요. 다른 맞벌이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힘들겠지만 저희는 일하는 시간대가 일반인들과 다르니까요.


정영주 씨는 나이가 들면서 더욱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나이가 들수록 거기에 맞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십 대부터 큰언니 같은 역할을 주로 해서 이제야 제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하는 셈인데요. 앞으로 <레 미제라블>의 마담 떼나르디에, <라이온 킹>의 주술사 라피키, <햄릿>의 거트루트 등 해보고 싶은 역할이 많아요. 여자지만 사자가 포효하는 느낌의 역할 있잖아요, 강하지만 날카롭기보다는 처절한 느낌의 울부짖음. <러브 네버 다이즈>가 한국에 들어온다면 또다시 마담 지리 역할을 맡고 싶고요. <선셋 대로>의 한물간 여배우 노마 데스몬드도 연기하고 싶어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제가 할 역할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바쁘면서도 기분이 좋아요.
이번 뮤지컬 시상식 후보 중에 40대 이상은 저랑 (최)정원 선배 둘뿐이더라고요. 그래서 정원 언니에게 문자 보냈어요. ‘40대 파이팅!’이라고. 그리고 기쁘게도 40대 여배우 둘 다 수상을 했어요.(웃음) 앞으로도 이경미, 전수경, 이태원 선배 등 언니들이 나이 들어서도 역할의 크고 작음보다 존재감 하나로 후배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는 존재였으면 좋겠어요. 저도 선배가 되는 입장에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할 거고요. <댄싱 섀도우>에서 마마 아스터 역을 맡았던 김성녀 선생님이나 <빌리 엘리어트>의 이주실 선생님을 보면, 배우가 그 나이에 맞는 연기를 하는 게 정말 편안해 보이고 멋있거든요.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6호 2010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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