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윅>의 존 카메론 미첼은 브로드웨이가 록 뮤지컬의 날선 에너지를 거세해 안전한 쇼로 만드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 예로 <렌트>를 언급했다. 오랫동안 이 작품의 한국 공연에서 음악감독 겸 번역자였던 박칼린 감독은 카메론 미첼이 한 말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한국에서 지난 10년간 <렌트>가 반복적으로 무대에 오르는 동안 원래 가지고 있는 질문들을 조금씩 잊어갔던 게 아닌가라는 의문과, 이 작품이 원래 품고 있는 무겁고 어두운 면들이 달콤하고 낭만적인 청춘물로 포장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 제기가 연출가에게서 나왔다면, 한여름에 만나게 될 일곱 번째 <렌트>는 기대해 볼 만하지 않을까.
초연 이후로 꾸준히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고, 지금까지 많은 스타들이 거쳐 간 작품입니다. 매력적인 캐릭터들도 많고요. 캐스팅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조건인 것 같은데요.
정선아가 미미를 했고, 그 뒤로는 미미를 뽑는 게 힘들어진 것 같은 그런 어려움이 <렌트> 캐스팅에는 있어요. 누가 콜린을 했고, 누가 로저를 했는데 그다음에는 누가 그 역을 하지? 같은 의문들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금까지 잘해온 배우들이 있지만 저는 이번에 연륜이 좀 있는 사람들을 원했고, 지금 저희 <렌트>의 배우들은 한 명이 빠지면 그 사람만 바꾸면 되는 게 아니라 전체를 다시 뽑아야 하는 조합이에요. 이번 캐스팅이 저는 참 마음에 들어요. 이번 공연에서 제일 자신 있는 부분이에요. 사실 늘 보는 배우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장단점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한번 시도해볼 수 있는 부분까지도 그냥 척보면 될지 안 될지 알겠다고 판단해서 안 하고 가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이번에는 지금까지 같이 작업을 해본 적이 없는 배우들이 더 많고 그래서 좋아요.
한국 초연 당시에는 실제 배역에 비해 한참 나이가 위인 중견급 배우들이 참여를 했고, 차차 연령대가 낮아지다가 지난 2009년 공연에서는 신인들로 팀이 꾸려졌죠.
언제나 극 중 배역과 같은 나이의 배우를 캐스팅할 수도 없고 진짜 그 나이라야 할 필요도 없어요.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그게 연기는 아니니까요. 언제부턴가 이 작품이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뮤지컬이라는 인식이 퍼졌고, 그래서 오디션에도 점점 더 어린 배우들이 몰렸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렌트>는 상당히 심각한 내용이고 음악도 어려워서 연륜이 있는 배우들이 필요해요. <그리스>처럼 마냥 분위기가 밝고 에너지 있으면 되는 작품이 아닌데 다행히 이번에 배우들의 연령대가 다시 올라가서 뿌듯해요.
음악감독에서 연출로 역할이 바뀌면서 작품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된 점이나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있는지.
달리 보인다기보다는 지금까지 제가 생각한 대로 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번에는 할 수 있다는 게 바뀐 점이죠. <렌트>라는 작품을 보면서 내가 해석하고 싶었던 방향들이 있었어요. 이제는 욕을 얻어먹든 잘못하든 어쨌든 내가 해보고자 하는 방향으로 할 수 있다는 그게 큰 차이죠. 나는 이 작품의 의미는 이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그걸 밀고 나갈 수 있다는 거요. 물론 음악감독이나 안무가나 조명감독이나 무대감독이나 스태프들은 대부분 자기 나름으로 작품을 분석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분들이에요. 그냥 연출가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지만 어쨌든 뱃사공은 한 사람이어야 하고 뮤지컬에서는 그게 연출가잖아요. 서로 중간치를 찾고 절충해 나가는 게 우리가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죠.
다른 스태프들과는 의견 차이가 큰 편인가요, 아니면 무난하게 조율이 되고 있나요?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저희 조명감독이나 세트 디자이너 선생님이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저 여자가 괜히 잘되어 있는 작품을 망가뜨리려고 한다고 하실까봐 좀 걱정스러웠는데 용기를 내서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이렇게 가면 어떨까라고 말을 꺼냈는데, 다른 분들도 선뜻 그러자고 하셔서 어, 이상하다, 왜 아무도 말리지를 않지? 하면서 오히려 약간 불안한 마음도 들고 그래요.(웃음)
배우들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분위기인가요?
배우들은 의견을 낸다기보다는 질문을 굉장히 많이 해요. 우리 엔젤은 왜 그렇게 질문이 많지?(웃음) 그런데 저는 이런 게 정말 좋아요. 앉아서 열 시간 넘게 작품에 대해서 서로 질문하고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하는 게 좋아요. 이번에 배우들의 연령대가 조금 높아서 더 질문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기존의 <렌트>와 비교해서 우리가 이건 왜 살리고 이건 왜 버리려고 하는지,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그 방향을 알고 함께 노를 저어야죠.
96년 브로드웨이 초연을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렌트>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아마 많은 분들이 ‘사랑!’이라고 이야기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건 그렇지가 않아요. 80년대 말에 에이즈라는 병이 제가 있던 미국 사회를 덮쳤어요. 그건 정말 트럭에 치이는 것 같은 충격이었어요. 일주일 만에 전국적으로 이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해 알게 됐고 그 쇼크와 두려움이 전 사회를 뒤흔들었어요. 우리 나이 대의 사람들은 그 시기를 다 경험했어요.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되고요, 자유를 찾는 젊은 보헤미안들의 예술혼이라고 해도 되고, 보는 사람마다으로 각자 관점에서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저는 대본으로 돌아가서 보자는 거예요. <렌트>라는 제목 자체가 잠시 있다가 간다는 거고, ‘No day But Today’ 라는 외침 자체가 에이즈를 가지고 있는 그 사람들 때문에 나온 이야기거든요. 이 작품은 굉장히 특수한 시공간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그렇게 몇 가지 테마가 동시에 존재하지, 결국은 다 사랑이다, 라고 단정 지어서 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에이즈에 대한 공포는 전 세계를 강타했지만 뉴욕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특히 엄청났다고 들었습니다.
배우들과 연습을 시작한 첫날에도 몇 시간 동안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그때 제가 다니던 학교는 정말 전쟁이 난 직후의 광경을 보는 것 같았어요. 예술대학이었으니까 게이나 레즈비언이 정말 많았고 마약을 하는 학생들도 많았어요. 어느 날 에이즈라는 병에 대한 기사가 폭탄처럼 툭하고 떨어졌는데 그 혼란이라는 게… 지금까지 나는 이렇게 살았는데 그럼 그렇게 살아온 나는 이제부터 없어지는 거야? 나 있어도 되는 거야? 그런 의문들이 모두를 덮쳤죠. 과학이 에이즈가 무엇인지 명백하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냥 그런 병이 있어, 다 죽어! 라고 하는 것 같은 그 공포에 멀쩡하게 어제까지 잘 있던 애가 오늘은 밥을 못 삼키는 거죠. 쟤가 감염자라는 데 그럼 죽는다는 건지, 옆에서 숨 쉬고 있는 나도 죽는다는 건지, 그런 불안감이 말도 못했어요. 정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몰라요. 제 주위에는 엔젤과 콜린 같은 커플도 있었어요. 제 미국 친구의 아버지는 뒤늦게 커밍아웃을 했는데 1, 2년 만에 에이즈에 걸려서 바로 돌아가시고 남자 친구는 혼자 살아남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어요. 결국, <렌트>는 그 시대, 그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거예요.
확실히 <렌트>에는 죽음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절실함이 있습니다.
그 정서를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관건인 것 같아요. 제가 가지고 가는 큰 테마 중 하나가 죽음을 대하는 다섯 단계라는 거예요. 그게 제 삶에서 하나의 지지대처럼 저를 잡아주고 있는데, 이 사람은 지금 어느 시점에 와 있다, 이 사람은 지금 어느 시기이기에 나와 이렇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요. 부정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의 다섯 단계 중에 각 캐릭터가 지금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를 찾으라는 이야기를 첫 연습 때 배우들에게 했어요. 엔젤은 지금 이미 다섯 단계를 다 지나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단계고, 누군가는 분노를, 누군가는 협상을 하고 있어요. 작품에서 각 캐릭터들이 ‘나는 두 번째 단계’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각자 자기 캐릭터를 공부하기 위해 깊이 생각해볼만한 부분이에요. 암이면 이걸 수술이나 항암요법으로 제거 하느냐 못하느냐, 했으면 산다, 못했으면 점점 더 퍼질거다 이게 명백하잖아요. 그런데 에이즈는 일단 HIV 보균자라 판명되면, 이게 오늘 갑자기 에이즈로 변해서 1년 안에 죽을지 10년 안에 죽을지, 잠재만 되어 있다가 20년 넘게 잘 살 수 있을지를 알 수 없는 채로 먹는 것 하나, 상처 나는 것, 감기 걸리는 것 하나까지 마음을 졸이면서 살아야 하는 거예요. 노이로제에 걸리지 않는 게 신기한 일이죠. 그리고 냄새가… 반점들이 썩어 들어갈 때의 악취가 있어요. 썩어가는 내 몸을 그 누가 안아줄까, 내일 아침 다시 눈을 뜰 수 있을까 라는 노래가 그래서 나온 거고, 그렇게 No day But Today 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렌트>라는 작품을 ‘아, 사랑 이야기야’ 라고 하면 너무 단순화한 거예요.
에이즈나 동성애, 죽음 같은 다수가 아직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요소들을 완화시켜서 보다 편하게 전달하기 위해 ‘사실 당신에게도 익숙한 똑같은 사랑 이야기’라고 뭉뚱그려서 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러다 보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보는 관객들도 점차 이 작품을 마치 <그리스>나 <풋루즈>와 비슷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곤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좀 심각하더라도 작품이 원래 담고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배우들과 첫날 했던 논의도 너는 <렌트>가 어떤 작품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거였는데, 이건 그냥 쇼가 아니고, 엔젤이 입는 그 옷이 웃기기 위한 옷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야 해요.
시대성과 지역성이 뚜렷한 작품일수록 번역 작업이 힘든 법인데요. 특히 막혔던 부분이 어딘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가 그래요. 오렌지족 기억나요? 한국의 압구정동이 처음 활기를 띌 때 그 오렌지족들이 돌아다니면서 그들끼리 썼던 말을 어떻게 영어로 번역을 하냐는 말이에요. 셰익스피어극의 영어처럼 유니버설한 게 아니라 시대와 공간이 너무 명확한 작품이기 때문에 오렌지족의 어휘를 미국인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게 할 것인가, 그런 맥락에서 정말 어려워요.
‘라 비 보엠’의 가사에 등장하는 수잔 손택이나 앨런 긴즈버그, 머스 커닝험 같은 이름들은 번역할 때 대체어를 찾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라 비 보엠’의 쇼핑 리스트 부분 가사만 따로 들고 다니고 있어요. 하나하나 어떻게 풀까 생각을 하느라. 가사를 번역할 때 순서가 있는데 우리 관객들이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건 먼저 가져가고, 이해 못할 부분은 이 노래가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것인가, 스토리를 전달해야 하는 것인가 분류를 해요. 그런데 ‘라 비 보엠’의 쇼핑 리스트는 아 이게 뉴욕의 젊은 예술인들이 자기들끼리 하는 말인데 한국 사람들이 이걸 잘 모른다, 그럼 한국의 홍대 앞에서 젊은 예술인들이 쓰는 말이 뭐냐. 스타일로 따지면 검은 바지, 검은 머리, 검은 아이라인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잖아요. 그런 문화적으로 유사한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한국의 어떤 걸 찾아야 해요. <렌트>가 워낙 한 시대에 유행했던 것들을 가져가기 때문에 좀 더 어려워요.
이 작품의 후반부에 드라마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생기는 결점을 채워주는 게 배우들의 진정성, 진심이 아닌가 싶어요.
그걸 찾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에요. 남자 둘이 키스한다고 박수 치는 그런 웃기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가 이번에 아주 철학적인 엔젤을 뽑았어요. 질문이 정말 많아요. <자나 돈트>에서 체스 챔피언인 마이크 역으로 나왔던 배우인데 그걸 깜빡했던 거예요. 첫날 연습 때 ‘남자랑 키스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라고 했는데 ‘많이 해봤어요’라고 해서 순간 ‘어, 지금 이 친구가 커밍아웃을 하는 건가’라고 잠깐 착각을 했죠.(웃음)
조나단 라슨이 남긴 가장 훌륭한 곡들이 이 작품에 다 들어 있습니다. 특히 애착을 갖는 곡이 뭔가요?
‘썩어가는 내 몸(Will I)’하고 ‘너 없이(Without You)’를 특히 좋아해요. 슬프지만 그 슬픔을 읊조리듯이 노래하는 곡이잖아요. 너 없이 구름은 다시 흐르고, 꽃은 피고, 돌고 도는, 죽고 또 태어나고 또 죽고 하는 그 윤회 같은 흐름을 관조하는 듯 한 슬픔이 참 좋아요. 부르기에도 좋고.
90년대 초중반에 만들어진 작품이고 이제 그 후 20여 년이 지났습니다. 리바이벌을 할 때는 변화를 주기 마련인데, 지역성과 시대성이 아주 명확한 이 작품을 2011년 현재 다시 이야기할 때, 지금이 2011년이기 때문에 반영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있나요.
2011년에 <렌트>를 한다는 것의 의미까지는 가지 못했고, 이게 건방진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쭉 생각해왔던 대로의 <렌트>를 한번만이라도 하고 싶었던 게 급선무였어요. 제가 이 작품을 재해석하고 싶은 게 아니고, 일단 가장 가깝게 올바르게 해석을 해보는 게 뭘까라는 거예요. 이미 재해석은 아주 많이 해왔으니까, 혹시 내년에 다시 하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다른 식으로 엎어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일단 대본으로 돌아가자는 게 목표예요. 그런데 그 생각은 해요. 과연 조나단 라슨이 자신이 필요한 만큼 돈을 쓸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밴드를 무대에 올렸을까, 미미의 그 파란바지, 상징적인 그 옷은 배우가 집에서 가져온 건데, 돈이 있었으면 제대로 의상을 제작했을 거란 말이죠. 2011년이기 때문에 최첨단 기술을 써서 어떻게 하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건 <렌트>라는 작품의 사상과도 맞지 않고요. 하지만 옛날 무대, 옛날 의상, 옛날의 모습을 고집할 생각은 없어요. 달리 표현할 수 있으면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요. 저는 그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대본을 깊이 들여다보면 실수들이 있는데 그걸 풀 수 있는 장치로 영상을 써볼까, 보통 영상을 사용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제 3자의 앨범을 넘기듯이 해서 관객들이 좀 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게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5호 2011년 8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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