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뮤지컬이 텔레비전 드라마 원작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그간 뮤지컬이 소설, 영화, 만화 원작에 주로 기대고 있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중성과 지명도가 높은 대중예술인 드라마에서 원작에 찾고 있는 것이다. 뮤지컬 <달콤한 인생>은 그 본격적인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아씨>나 <여로> 같은 추억 속의 드라마가 악극으로 공연된 예가 있었고, 1990년대에는 1960년대 라디오 드라마에서 출발하여 영화를 거친 <남과 북>이 뮤지컬
텔레비전 드라마를 뮤지컬로 만든다는 기획에 대해, 누구나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우려는 ‘그 긴 작품을 어떻게 2시간으로 압축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아마 이는 창작자들도 가장 고민스러웠을 지점이다.
그래서일까. 뮤지컬 <달콤한 인생>은 이러한 우려를 무난하게 극복하고 있다. <대장금>이 원작을 보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작품인 것에 비해, 적어도 뮤지컬 <달콤한 인생>은 원작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무난히 줄거리를 이해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뮤지컬은 여주인공 혜진이 공항버스를 타고 공항 대합실에 가서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 준수의 또 다른 애인인 다애를 지켜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짧은 장면 이후 극은 잦은 피드백으로 과거 준수와 혜진, 다애와 동원이 얽힌 사랑의 관계를 풀어놓는다. 혜진과 동원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곪아 있다. 유능한 펀드매니저인 동원은 요조숙녀 아내를 결혼과 동시에 집에다 ‘짱박아놓고’ 일과 돈과 여자라는 동력으로 움직인다. 명품 밝히는 다애는 동원의 애인이며, 혜진은 이런 결혼생활에 실망하여 죽으러 간다는 편지 한 장 남겨놓고 훌쩍 북해도로 떠난다. 거기에서 미래도 자기 확신도 없이 살아가는 준수를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준수는 재벌 아들인 성구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그 호화스러운 생활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살아왔는데, 성구가 사고로 살인을 하고 일본으로 도망가 잠적하자 그를 찾아 일본으로 온 것이다. 일본에서 준수는 성구를 만나지만 결국 그의 죽음을 방치하고 성구 이름과 돈과 재산을 가로채어 살면서 성구 아버지가 자신을 해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정체성의 혼란에 불안해한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준수는 사랑하는 혜진을 일부러 떨쳐 내고 다애와 프랑스로 가자고 표를 주어 비행기를 태운 뒤, 자신은 화려한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창문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다.
꽤나 복잡한 줄거리나, 드라마를 보지 않고 뮤지컬만 본 사람도 이 정도의 줄거리는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작품은 잘 정돈되어 있다. 다애와 동원의 인물 형상화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이야말로 무대화를 위한 최소한의 정돈으로 인정해줄 수 있다. 드라마 원작의 복잡한 인물들을 다 잘라내고 짧은 대사와 장면에 많은 정보를 넣고 빠르게 장면을 전환하는 방법으로, 다소 무리해 보이는 줄거리 전달에 무난히 성공한 것이다. 여기에 장면마다 적절한 노래가 배치되었으니 뮤지컬의 꼴은 갖춘 셈이다.
그런데 그뿐이다. 줄거리도 알겠고 뮤지컬의 꼴도 갖추었는데도 이 작품은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버거운 줄거리를 허덕거리고 따라가는 인상이 강하다. 그러면서도 작품은 어느 지점을 향해 역동적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자살하고 싶은 사람들이 만나 결국 한 명이 자살을 하는 이 이야기가, 느낌도 없고 어디로 달려가고 있다는 속도감도 없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닌가.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뮤지컬의 꼴을 갖추기는 했으나, 이 작품이 결국 극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인물도 앞으로 밀고 나가는 동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극이 목표를 향해 밀고 나가는 느낌을 주려면 인물의 행동이 극을 밀고 나가는 동력이어야 한다. 하지만 혜진도 준수도 그런 동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당연히 극은 방향감을 가질 수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거리만 흘러간다. 이 작품이 빼곡하게 들어찬 정보를 정신없이 받아들이게 만들면서도, 이상하게도 공연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극적 추동력이 없는 상태에서 줄거리만 흘러가기 때문이다. 즉 관객이 어느 대목에서 어떤 궁금증과 긴장감으로 다음 장면을 기대해야 하는지가 설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극적 추동력이 매우 적어도 좋은 공연이 될 수 있다. 그때에는 극적 추동력이 아닌 다른 지점을 초점으로 삼는 경우이다. 분위기나 정조, 놀이성, 혹은 갈등 구조 이외의 구조적 짜임새 등이 주도함으로써 재미있는 연극이 되는 예는 수없이 많다. 사실 원작 드라마 <달콤한 인생>은 분위기가 정서적 질감이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를 만들어준 것은 일본 북해도에서부터 서울 강남의 세련된 카페를 오가는 화면과 흔들리는 눈빛을 지닌 주연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였다. 그런데 드라마는 이것만으로는 지루할까 불안하여 준수를 추적하는 말년 형사를 배치하여 박진감을 느낄 수 있도록 추리물의 요소까지 가미했다.
내가 뮤지컬 <달콤한 인생>에서 가장 불만스러운 대목은 극적 추동력의 부재 자체보다는, 어떤 것도 초점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뮤지컬은 도대체 관객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미스터리의 긴장감인가? 죽음 직전에 만난 사랑의 짙고 순수한 느낌인가? 가장 소비적이고 화려한 서울이란 도시의 부박한 삶 한복판에서 만난 불안하고 텅 빈 영혼의 충격인가? 줄거리, 인물과 사건이 있다고 주제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며, 말끔하게 정돈된 노래가 대목마다 배치된다고 작품의 서정성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원작 드라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서정성, 럭셔리하면서도 허무한 질감을 형성해주던 화려한 시각 효과는 뮤지컬 각색에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해봤자 북해도의 이국성과 청담동의 매끈함을 무대에서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사(實寫 )화면의 일루전을 조금이나마 무대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려 애쓰는 것은 무망한 노릇이다. 무대예술은 다른 방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인물과 사건의 전개방식의 전면적 재조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창작뮤지컬이 안타깝다.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더 근본적으로는 인터넷 소설이 있었지만) 연극 <옥탑방 고양이> 같은 작품이 소박하지만 연극에서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원작을 자신만만하게 전면적 재조정하여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드러내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똑같은 대중예술임에도 이런 차이가 벌어지는 것은, 혹시 뮤지컬 창작자들이 연극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법·기법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즉 아직 우리가 뮤지컬의 문법을 자신 있게 체득한 수준이 아니라서 그 문법을 익히고 기법에서 그리 빠지지 않는 작품을 만들어내기에 급급하여, 정작 가장 중요한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를 등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드는 것이다. 뮤지컬 창작의 기법 훈련이 되어 있으나, 아무런 ‘맛’을 내지 못하는 이런 작품이 안타까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3호 2010년 8월 게재기사입니다.